금발의 체스여왕, 30명과 다면기 ‘압권’
[일요신문] 세계 청소년들이 모여 치밀한 두뇌 싸움을 벌이는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가 2013년 12월 27일부터 시작해 29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한체스연맹에서 주최하고 강릉영동대학교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한국과 중국, 일본, 대만 등 13개 나라에서 1000여 명의 선수와 학부모가 참여해 뜨거운 열기를 보여줬다. 2박 3일 동안 진행된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이 대회에 게스트로 초청된 전 여류 체스 챔피언 스크립첸코가 청소년 체스 유망주 30명과 다면기를 두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12월 27일 오후 1시. 강원도 강릉시에 위치한 강릉영동대학교에 도착했다. 강원도 특유의 매서운 바람이 학교 곳곳을 휘감고 있었다. 그런데 유독 체육관 한 곳만은 열기가 가득했다.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의 개회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체육관 안에는 수백 명의 학부모와 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대 중앙에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듯 축하 공연을 할 연주단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국내에서 첫 번째로 시도되는 마인드스포츠 대회다. 바둑, 체스 등 두뇌를 겨루는 마인드스포츠 대회는 다른 스포츠 대회와는 달리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분야다. 게다가 첫 대회부터 특별한 시도를 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현인숙 대한체스연맹 회장은 개회사에서 “오늘 우리는 ‘마인드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동서양의 지혜와 문화를 상징하는 바둑, 체스와 새로운 시대의 총아 e-Sports가 만나 문화의 융합을 시도하는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의 마인드스포츠가 모였다는 것. 대회 관계자들은 “바둑이면 바둑경기만 하고 체스면 체스경기만 했지 이렇게 동시에 하는 것은 아마 최초일 것”이라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를 포함 e-Sports까지 모였기에 ‘융합’이라는 행사 목적에 부합했다는 평가가 여기저기서 이어졌다.
간단한 개회 행사가 끝나고 특별 개막식 이벤트로 e-Sports 경기 대회가 시작됐다. e-Sports 경기 중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리그오브레전드(LOL)를 종목으로 프로팀 SK텔레콤 T1와 나진 소드가 맞붙었다. 각각 5명씩 나와서 겨루는 리그오브레전드 경기는 전통의 강호인 나진 소드가 SK텔레콤에게 3 대 0으로 패배하면서 반전이 벌어졌다. 승리한 SK텔레콤은 상금 1000만 원을 획득, 패배한 나진 소드는 500만 원의 상금을 획득해 환호를 자아냈다.
또 다른 건물에서 벌어진 ‘세계 체스챔피언 초청 행사’는 체스 황제이자 세계 최장기 체스챔피언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개리 카스파로프(Garry Kasp
e스포츠 경기 모습.
arov·50)의 팬 사인회가 진행돼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세계 체스챔피언 초청 행사의 단연 백미는 전 여류 세계 체스챔피언 알미라 스크립첸코(Almira Skripchenko·37)와 청소년 유망 선수들과의 체스 다면기 시합이었다. 30명가량의 청소년 유망 선수들은 비장한 얼굴로 기물을 옮기며 챔피언과의 일전을 진지하게 임했다. 체스 경기를 관전하던 박찬성 심판(32)은 “청소년들은 대회에 참여해 한 번씩 우승한 경력이 있는 최강부와, 체스에 실력이 있는 중고등부 등 다양한 연령대로 이뤄져 있다. 비록 승부에서 이긴다고 해도 별다른 상은 없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이 상당히 보기 좋다”라고 평했다. 체스 경력 7년이라는 한 고등부 학생은 “체스를 하다보면 바른 자세와 태도를 익히게 돼 그 점이 가장 좋다. 체스에서 배운 것을 토대로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바르게 임하는 태도를 유지하게 된다”며 체스 예찬론을 폈다.
오후 행사를 마친 후 이어진 야간 행사에서는 수퍼체스 이벤트, 9줄 바둑, 도전! 체스-바둑 골든벨이 이어졌다. 세계 청소년들의 열띤 참여로 마인드스포츠 대회 첫날은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본격 행사는 다음날 토요일부터 시작됐다. 오전 10시부터 바둑대회와 체스대회가 막을 올린 것. 정신을 가다듬는 1분간의 명상 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체육관 가득히 울려 퍼졌다. 강원도 성덕초등학교에 다닌다는 김남호 군(9)은 “너무 긴장되고 떨린다. 꼭 이기고 싶다”고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바둑판 위에 고사리손이 움직였다. 대회에 참여해 본 경력이 많은 청소년들은 부지런히 바둑 시계를 눌러가며 돌을 옮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어른들은 “이것 봐. 얘들 정말 잘해!”라고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대회 개회식에 참석한 내빈들. 가운데 외국인이 세계 체스 챔피언 개리 카스파로프다.
1시간가량이 지난 후 속속 승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몇몇 승부처에서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승자는 패자를 위로하고 패자는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장면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바둑경기를 총감독한 홍시범 Club A7 감독은 “이긴 사람은 기분이 좋지만 진 사람도 얼마나 할 얘기가 많겠느냐. 그래서 승패 판에 X를 쓰진 않는다. 진 사람이 가슴이 아프니까…”라고 전했다. 실제로 승패 판을 보니 이긴 사람은 큰 동그라미, 진 사람은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되어 있었다.
기나긴 승부가 끝나고 결국 우승자가 가려졌다. 체스 부분 최강부 우승은 이준혁 군(15), 바둑 부분 최강부 우승은 박준형 군(15)이 차지했다. 박준형 군은 “주변이 너무 산만해서 집중이 잘 안되긴 했지만 결국 이렇게 이겨서 너무 기쁘다. 다음해에도 꼭 다시 참여하고 싶다”라고 전했다. 우승자가 가려지고 시상식 및 축하 마무리 공연이 끝난 후 다음날 강릉 일대 관광으로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는 막을 내렸다.
‘생각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취지로 시작된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는 그렇게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대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내년에는 겨울 이 아닌 여름에 개최하며, 마인드스포츠뿐만 아니라 청소년들끼리 다양하게 호흡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년에 열릴 제2회 세계 청소년 마인드스포츠 대회가 더욱 기대된다.
강릉=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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