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주영에 “조선소 포기하면 현대와 인연 끊겠다”
이는 한·미 정상회담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동성명 당일까지 양측 실무자간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존슨 대통령이 월남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전격제의한 데 대해 박 대통령이 화답함으로써 공동성명 발표 직전 추가 삽입돼 이루어진 것이다.
1977년 현대조선소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 영애. 맨 오른쪽은 정주영 회장.
박 대통령은 서울을 벗어나서는 우수한 연구진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홍릉 임업시험장을 방문해 “임업시험도 중요하지만 과학기술연구는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임업시험장 면적 2분의 1 이상인 15만 평을 연구소 부지로 할애 조치했다. 1960년대 중반 초근목피와 보릿고개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국가의 백년대계를 내다본 참 지도자의 혜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해외의 우수 두뇌 초빙을 위해 주거, 병역, 봉급 문제 등에 있어 최형섭 소장이 요구하는 대로 파격적인 지원을 뒷받침했다. 연구원들의 봉급명세표를 받아본 박 대통령은 “대통령보다 많이 받는 사람도 많군”이라면서 “그대로 시행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연구원들의 봉급체계는 국내 교수의 3배 수준으로 해외파에 대한 지나친 우대라는 비판과 함께 국내파와의 불균형 논란이 일었다.
박 대통령은 인사와 예산에 있어서 외부의 청탁이나 간섭을 받지 말고 오로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소신대로 연구소를 운영할 것이며, 예산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지 말고 대통령에게 직접 말하라고 최 소장을 격려했다. 박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연구소를 방문해 관심과 격려를 표했으며 애로사항들을 해결해 주었다. 경제기획원 예산책정보고회의 때에는 연구소 예산에 대한 특별관심을 표명했고 예산당국도 연구소에서 신청하는 대로 반영, 창의적인 연구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한국과학연구소는 단시일에 이론만이 아닌 산업체와의 연계연구와 제품 및 제조기술 연구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산업체로부터의 수탁고는 점증했으며 과학기술 진흥과 공업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후 중화학공업 건설과 병행해 대덕, 창원, 구미 등에 대규모 국가연구단지를 조성하고 선박해양연구소, 표준연구소, 화학연구소, 핵연료개발공단, 기계금속연구소, 전기기기연구소, 전자통신연구소 등을 설립해 과학기술 진흥을 뒷받침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경제성장의 고도화 △100억 달러 수출 달성과 지속적인 수출증대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3대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가적 대과업이었다. 이 전략 목표 중 핵심은 방위산업 육성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더욱 가중된 북한의 남침 위협과 주한미군 철수계획에 대비해 자주국방태세 확립이 긴요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선언했고 1월 말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대한 보고회의를 김종필 총리 등 관계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4시간 동안 청와대에서 개최했다. 100억 달러가 소요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은 연 수출 20억 달러 미만의 경제규모에 비추어 엄청난 무리임이 틀림없었으나 박 대통령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이를 밀어붙였다. 고속도로도, 포항제철도 모두 어려운 가운데 무리를 무릅쓰고 ‘돌격 앞으로!’ 했기에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김일성의 남침야욕을 꺾고 남북 간 경제전쟁에서의 승리는 물론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이 길뿐이라는 박 대통령의 신념이 확고했다. 이 회의에서 재원조달에 관해 박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박 대통령 : “오 수석, 돈은 얼마나 드나.”
오원철 경제수석 : “내·외자 합해 100억 달러가 필요합니다.”
박 대통령 : “남 재무. 돈을 낼 수 있소?”
남덕우 재무장관 :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액수가 너무 커서….”
박 대통령 : (잠깐 생각을 가다듬은 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나.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 국민이 잘 따라주지 않았나. 결과는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었지만…. 우리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평화를 지키고 선진국에 진입하려는 것인데 이 사업에 협조를 안 해주어서야 되겠나.”
남덕우 장관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전 국민의 참여와 분발을 촉구한 언명이었다. 비장하고 결연한 기운이 감도는 회의장 분위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렇게 해 역사적 발진을 하게 된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의 기본소재가 되는 철강, 비철금속(구리·아연), 정밀가공(기계공업), 전자공업, 조선, 석유화학의 6개 부문을 국제단위로 하되 전략적 수출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군수방위산업과 민수상업용을 연계함으로서 군수 쪽의 수요한계를 극복하면서 수출증대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운용의 묘를 기했다.
6대 중화학공업기지 건설에 있어서는 안경모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의 노고와 공적이 각별히 컸다고 김정염 회고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지들은 과거 공장부지 중심의 공업단지 조성 개념을 뛰어넘어 국제적 규모로 대형화하고 연관 산업을 집결시켜 경제성과 경쟁력을 제고토록 할 뿐만 아니라 주거, 행정시설 등을 일괄 계획하고 동시 개발하는 개념이었다.
특히 창원 탱크수리제작소 건립 때에는 경제성을 염려해 사업 참여를 주저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보너스를 얹어주어 이 사업에 뛰어들게 했다. 박 대통령은 한국형 탱크 개발과 관련해 기동력이 뛰어난 경장갑차 스케치를 직접 작성해 관계자들에게 주기도 했다.
방위산업의 집중적인 육성 끝에 1977년 6월 박 대통령은 중부전선 기지에서 삼부요인, 여야 정치인, 외교사절, 한·미 고위 장성 등 2000여 명의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국산무기 화력시범대회를 열고 155㎜ 대포와 발칸포, 장갑차, 헬리콥터 등 국산 병기의 성능을 성공적으로 시험했다. 이 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애석하게도 이석표 방산담당 비서관이 희생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어 1978년 7월에는 서해해상에서 중·장거리 미사일과 다연장로켓, 대전차로켓의 시범발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건설로 1977년 말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초과 달성했고 1인당 GNP(국민총생산)는 1000달러에 이르렀으며 박 대통령 집권 마지막 해인 1979년 말에는 수출 147억 달러, 1인당 GNP 1546달러를 달성했다.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를 마치고 다음과 같이 마지막 일기를 남겼다.
“오늘 오전 10시 여의도 5·16 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거행됐다. 우리 국군 건국 초부터 공산침략도배들과 혈투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막강한 대군으로 성장했다. (중략) 오늘 행사에 동원된 장비 중 70~80% 이상이 우리 국산 장비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지난해 9월 26일 시험발사에 성공한 다연발로켓과 중·장거리 유도탄이 처음으로 국민들 앞에 선을 보임으로써 국민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영을 받았다. 이제 외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우리 군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강해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달라졌다. 사기가 문자 그대로 충천하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막강한 국군을 가져본 것은 처음이리라. 장병들이여 더욱 분발해 조국을 빛내도록 하자. 국군장병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으라.”
울산 현대조선소 건설과 관련해 박 대통령은 현대가 조선소 건설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앞으로 정부의 정책사업에 참여시키지 않겠다고 정주영 회장을 몰아붙였다. 정 회장은 사력을 다해 동분서주한 끝에 영국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게 됐고 조선소 건설에 착수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울-울산을 오르내리면서 독려했다.
이러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술·기능인력의 대량 양성이 시급했다. 즉 10분의 1㎜ 가공기술을 100분의 1㎜ 정밀가공 기술로 높여야 하며 이런 수준의 정밀가공 기능 및 기술 인력이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필요했다.
박 대통령은 전 국민의 과학기술화 운동과 국민 1인1기 운동을 제창하고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는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국민 모두가 기술을 배워야 국력신장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금오공고가 설립돼 질 높은 우수기술 기능 인력이 배출된 데 이어 전국적으로 11개의 유사한 공고를 증설해 기능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정수직업훈련소 창설을 필두로 각 도청소재지와 창원, 이리, 성남 등에 단기 직업훈련소를 증설해 기능공 양성을 서둘렀다.
이렇게 양성된 기능인력들은 중동 진출에서 국위를 선양했고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며 오일쇼크로 인한 외화 부족사태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기능올림픽 대회를 휩쓰는 쾌거가 계속됐고 기술·기능인의 사기는 충천했다. 수백 년 동안 기술을 천시하던 사농공상의 가치관이 이 시대에 확 바뀌었다. <위 내용은 김정염 회고록과 오원철 회고록을 참조했음…다음호에 계속>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염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