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나라당 전체 분위기는 이 후보에 대한 치열한 충성경쟁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일부에서는 우려의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얘기도 있다. 의원들은 의원들끼리, 참모진은 참모진끼리 공공연히 시기하고 질투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 때문에 대선전략에 차질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국가기관의 한나라당 눈치보기나 공무원들의 한나라당 줄대기 양상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소속 의원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어차피 대선에서 승리하면 논공행상이 벌어질텐데 이왕이면 좋은 자리나 충분한 대접을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때문에 이 후보의 ‘눈도장’ 받기 사례는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먼저 ‘눈도장’ 사례는 김대업씨 고소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김씨는 지난 7월31일 이 후보 아들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면서 언론에 전면 등장했다. 주요 당직자들은 예상했던 대로 여권이 병풍을 들고 나왔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병풍에 대한 대응방안을 두고 일부 당직자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당시 내부 회의에서는 김씨를 상대로 민사소송만 제기하고 형사소송은 안하기로 했다. 형사소송을 제기할 경우 병역비리에 대한 검찰수사가 본격화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의 분위기는 형사소송까지 해야한다는 쪽으로 점차 흘러갔다. 강경대응만이 이 후보를 살리는 길이라고 대부분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당직자들은 여권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이들 신중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김씨에 대한 소극적 대응이 이 후보에 대한 충성심이 약한 것처럼 인식되는 당내 분위기 때문이었다.
결국 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검찰의 병풍유도 발언’이 나오면서 김씨 고소사건은 한나라당 스스로가 올가미에 걸려든 꼴이 됐음을 보여줬다. 한나라당이 지난 8월 말 방송사를 상대로 이른바 ‘신 보도지침’을 발송했던 사건도 유사한 사례로 꼽힌다. 당시 공문은 당 공정방송특위 소속의원들의 의견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진 데 대해 이 후보측의 한 관계자는 “평소에는 합리적인 언론관을 가지고 있던 의원들이 왜 그 같은 공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다른 의원들과의 충성경쟁 과정에서 초조감을 느낀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지난 8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원들에 둘러싸인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 ||
영화 <보스상륙작전>에 대해 한나라당의 일부의원이 보여준 해프닝도 비슷한 발로다. 지난달 개봉한 이 영화는 검찰이 조직폭력배를 소탕하기 위해 룸살롱을 직접 차린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영화 홍보대행사는 영화에 나오지도 않은 ‘장나라당’과 ‘먼저당’의 명칭을 사용하고 대통령 후보의 아들이 병역비리가 있다는 식의 문구를 홍보전단에 사용했다. 한나라당을 비꼬는 듯한 내용이었다.
한나라당이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당시 선거전략회의에 참석한 일부 의원들은 “영화 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한다”고까지 말했다. 한 의원은 “병역비리를 저지른 정치인을 비방하는 이 영화가 사실상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비방하고 있다”며 공개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보대행사가 홍보를 위해 검찰 및 경찰의 압력과 야당의 의혹을 의도적으로 제기했다고 털어놓음으로써 이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정쟁으로 끝난 국정감사는 의원들의 자기 공적을 과시하는 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국방위 소속 P의원은 당 고위선거전략회의에 참석, 이 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적기록부가 조작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이 완전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회의를 지켜봤던 당의 한 관계자는 “솔직히 의혹이 완전히 해명된 것은 아니지 않느냐”면서 “(P의원이)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참석자들에겐 좀 멋쩍은 면이 없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 의원이 공로를 독차지하려는 경향은 의원들간 협조체제를 무너뜨리는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당 차원에서 대응해야할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의원들이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선거 전략 상 애로사항이 종종 발생한다는 것. 현대상선의 4천억원 대출사건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지난달 25일 국회 정무위 국감에서 엄호성 의원은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로부터 4천억원 대북 비밀지원 의혹을 이끌어냈다. 현대문제를 준비해왔던 안택수, 정형근, 이성헌 의원 등도 다음날부터 이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연속해서 이 문제를 터뜨리자 정치권에서는 한나라당이 사전에 치밀한 전략을 짜고 이를 준비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같은 당 의원들조차도 엄 의원이 이 문제를 제기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사전에 조율하지 않고 따로따로 준비를 해왔던 의원들은 엄 의원이 먼저 치고나가는 바람에 부랴부랴 뒤따라갔던 것.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성토성 발언도 없지 않았다. 당 차원에서 ‘대북뒷거래진상조사단’을 뒤늦게 만든 것도 실은 정보공유를 통해 당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후보에게 직접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례는 문건을 통한 ‘단독 보고’에서도 나타난다. 의원들이 문건을 선호하는 이유는 보고서를 생산해 낸다는 것 자체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겉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 이로 인해 문건이 유출된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당의 한 관계자는 “보고서 유출사건이 발생할 경우 자칫 엄청난 표를 잃을 수도 있다”면서 “이 후보에게 무분별한 보고서 제출에 대해 제재를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밖에 의원들은 이 후보가 참석하는 회의에서 과거에 비해 장황한 발언을 하는 등 이 후보를 의식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