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개최해왔던 변회와 대법원 사이의 간담회가 올해엔 다소 어렵게 성사된 측면이 있다. 지난해 12월 변회 측이 하위평가를 받은 법관의 실명 공개를 결정하면서 이를 둘러싸고 변회와 대법원의 힘겨루기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매년 변회는 서울 지역 변호사 회원을 대상으로 회원이 맡은 사건의 담당 판사를 평가해왔다. 올해 처음으로 온라인 설문을 실시하면서 참여 회원이 배로 늘어 1000명 이상의 변호사가 4000건이 넘는 평가 건수 결과를 내놨다. 변회 측이 지난 17일 설문평가 통계를 마무리하자, 같은 날 대법원 측은 공문을 보내 “간담회를 개최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위 법관 실명 공개를 그만큼 의식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변회 측에선 간담회 개최의 조건으로 재판 진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법관을 재판업무에서 배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이 난색을 표하면서 잠시 실무 접촉이 중단됐다.
사실상 양측의 쟁점은 하위 법관의 재판업무 배제 여부다. 이것에 소위 ‘워스트 3’의 실명 공개 여부도 달려있다. 대법원 측에선 이것을 헌법상의 사법권의 독립에 저촉되며, 법관은 징계에 의하지 않고는 불이익을 줄 수 없다는 법관징계법에 위배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변회 측에선 “재판업무에서 배제하는 것이 곧 징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징계가 아니라면 헌법 위배도 아니다. 연구법관으로 가면 오히려 승진이 될 수도 있다”고 다른 의견을 내놨다. 실제로 법관은 재판업무 외에도 사법연수원 교수 재판연구원 공보 기획 등 많은 보직이 존재한다. 서울지역의 한 변호사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법관의 개인적 판단까지도 법관의 독립이라는 범주에서 보호하려 한다면 헌법상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본권은 침해되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그러나 대법원 측에선 재판 진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판사에 대해선 정식 청원을 활용하라는 입장이다. 부적절한 사례가 있으면 구체적 사실을 특정해 징계요청 절차를 밟으면 당사자의 소명과 자료수집 등을 통해 징계사유가 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므로 굳이 변회의 평가자료를 통해 소위 ‘문제 법관’을 업무에서 배제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부터 변회 측은 해마다 모범법관을 뽑아 대외적으로 발표하면서 하위 법관의 명단 역시 대법원에 전달해 반영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공정 △품위․친철 △직무능력 △구체적 사례 △기타 의견의 5가지 항목을 우수-보통-미흡으로 나눠 평가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해당 법관에게 인사상 조치는 물론 약간의 언질조차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 변회 측은 5명을 공개하기로 했으나 데이터 분석 결과, 3위와 4위의 차이가 현격해서 하위 3명만 공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변회의 한 관계자는 “공개 여부 자체의 논의는 이미 끝났다. 연기는 될 수 있겠지만 발표 시기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해 조만간 실명을 공개할 것임을 시사하면서도 “문제 법관에 대해 업무 배제만 하면 법원행정처에 명단만 전달하고 대외적으로 공개는 안 할 것”이라고 밝혀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워스트 3 명단은 현재 변회 내에서도 극소수의 관계자만 인지하고 있는 등 보안이 철저하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명단에 든 법관들은 아마도 젊은 판사보다도 부장판사 급이 아닌가 싶다”고 관측하기도 했다. 실명 명단은 보도자료의 형식으로 1월 23일 오전 10시께 변회 홈페이지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한 차례 연기됐다. 법조계 일반에서는 만약 공개가 단행된다면 오는 2월 중순 정기법관인사를 앞둔 시기로 보고 있다.
이렇듯 좀처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던 양측이 27일 공식간담회를 열어 소송절차 정상화 방안에 대해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변회 측이 “일단 만나서 얘기해 봐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나승철 회장이 직접 나간다”고 밝힌 반면 대법원 측은 공식적으로 문제 법관의 재판업무 배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대신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한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상태다. 물론 명단 공개 보류 혹은 철회가 선결조건이다. 문제 법관 재판업무 배제 논의에 대해 양측의 입장차가 분명하기 때문에 간담회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
이러한 변회의 하위법관 실명 공개를 두고 젊은 집행부의 ‘파격적인’ 변혁 시도라는 시선도 존재한다. 나승철 회장은 1977년 생으로 지난해 1월 36세로 회장에 당선되면서 최연소 취임 기록을 세웠다. 당시 나 회장은 로스쿨 제도가 서민들의 법조계 진출 기회를 막는다며 사법시험 존치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또 변호사업계의 근로기준법 준수와 변회 회계의 투명성 제고를 약속했다. 지역 로스쿨 졸업자의 서울 개업 유예를 주장해 주목받기도 했다. 그를 둘러싸고 젊은 집행부, 개혁, 변화의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변회 내부에서도 공개 여부를 두고 공개파와 신중파로 갈려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실명 형태로 명단이 공개되면 엄청난 후폭풍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워스트 3’로 지목받은 판사가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 관계인들 사이에서 해당 법관을 기피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인천지역의 한 변호사는 “주로 나이가 있는 판사 중에 권위적이고 윽박지르는 판사가 가끔 있는데 젊은 판사 중에도 함부로 말하는 판사가 간혹 있다”며 “피고나 증인에게뿐 아니라 변호사에게도 고압적 태도로 대한다. 성격이 강한 변호사가 아니면 그냥 참는다”고 밝혔다.
앞서의 서울지역 변호사는 “변회 측에선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는 데 방해 요소가 있다고 본 것이 아니겠느냐”며 “반면 대법원 측에서는 압력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을 진행할 때 법관이 공정한 법의 잣대로만 판단하면 이런 문제를 제기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법 이외의 판사의 사적 경험 감정 주관적 판단 등이 개입될 여지가 있고, 그런 성향을 나타내는 법관에 대해서 공정한 재판을 위해 시그널을 줘서 자성하게 한다는 차원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변회 측에선 “발표 강행이 중요한 것은 절대 아니다”라며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국민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장 잘 보장하는 방법을 논의해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변호사와 판사가 기싸움을 하는 것처럼 읽히는 것은 원하지 않는 바다. 국민이 법조인을 바라보는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잘 협조해야 한다. 법관들도 법원을 나오면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나? 서로 설득하는 관계가 아니라 협조하는 관계“라고 강조하며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대법원 측 역시 “더 좋은 재판을 할 수 있게끔 자극하는 목소리를 헌법 질서를 파괴하지 않고 삼권분립의 사법시스템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실무단 차원에선 계속 논의해 갈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신상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