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끈한 제약업계도 먹고 먹히는 정글로…
녹십자가 일동제약에 대한 ‘적대적 M&A’를 시도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일동제약 본사 전경. 구윤성 기자
일동제약 지분 29.36%를 보유하고 있는 2대 주주 녹십자와 9.99%를 보유하고 있는 3대 주주 피델리티는 24일 일동제약 임시주총에서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에 반대,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가결될 수 있었던 안건을 부결시켰다. 녹십자 관계자는 “주주가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해 지주사 체제 전환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지주사 체제로 전환해 경영권을 지키려 했던 일동제약은 이제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할 판이다.
당초 단순 투자자로 분류됐던 녹십자가 느닷없이 일동제약 경영권 분쟁의 진앙으로 떠오른 것은 지난 1월 16일. 녹십자 측이 개인 주주였던 이호찬 씨의 일동제약 지분 12.57%를 매입했다고 공시하면서다. 녹십자의 일동제약 지분율은 30% 가까이 치솟았다. 윤원형 일동제약 회장 등 일동제약 경영진의 지분은 34.16%에 불과, 4.8%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일동제약 측이 일부 주주들과 맺은 공동보유계약 지분까지 전부 합한다 하더라도 일동제약 측 지분은 37.04%다.
만약 9.99%를 보유하고 있는 3대 주주 피델리티가 녹십자와 손을 잡는다면 지분율은 역전된다. 지난 24일 임시주총에서 피델리티 측이 녹십자와 함께 일동제약의 지주사 전환에 반대표를 던진 것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녹십자와 피델리티의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것. 일동제약의 경영권이 녹십자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힘을 받고 있다.
녹십자의 추가 지분 매입 목적이 ‘단순투자’에서 ‘경영참여’로 바뀐 것도 경영권 분쟁에 불을 지폈다. 녹십자 측은 그러나 적대적 M&A 시도를 부인했다. 녹십자 관계자는 “경영참여 목적은 맞지만 경영권을 가져오겠다는 등 적대적 M&A 시도는 절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녹십자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재계 관계자는 “지분으로 위협하고 경영참여를 공식화한 마당에 적대적 M&A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느냐”고 반문하며 “주총에서 지주사 전환까지 반대했다면 누가 봐도 경영권을 노리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재계 고위 인사 역시 “겉으로 적대적 M&A라고 밝히지는 않겠지만 지분을 매입하고 주총에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 등은 적대적 M&A 의도가 있는 행위로 봐야 한다”며 “적대적 M&A를 선포하고 지분 공개 매입을 추진하는 순간 전쟁”이라고 잘라 말했다.
적대적 M&A의 대상으로 떠올랐음에도 일동제약 측은 의외로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일동제약 관계자는 “현재 녹십자 측과 계속 대화를 진행하고 있고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 중”이라며 “저쪽(녹십자)에서 별다른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는 상황에서 뚜렷하게 대응 방안을 밝히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녹십자 측의 지분 매입과 지주사 전환 반대 행위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적대적 M&A 시도라고 밝히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그렇게 몰아가고 단정하기는 힘든 것 아니냐”며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앞서의 재계 고위 인사는 “펀드·기관투자가 등의 지분을 끌어올 수 있는 방법 등을 따져보는 등 (일동제약이) 내부적으로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제약업계에서는 그동안 대형 제약사 간 적대적 M&A가 힘든 것으로 인식돼 왔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업력이 오래됐고 오너들 간 서로 친분도 있는 터라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제약업계 관계자는 “제약사는 오너들의 분신과 같은 존재여서 지금까지 대형 제약사 간 적대적 M&A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면서도 “다만 오너 2, 3세로 내려가면서 서로 관계가 멀어지고 지분율이 희석되면서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일동제약은 윤용구 창업주 손자인 윤웅섭 부사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오너 3세 경영을 하고 있다.
휠라코리아도 경영권 분쟁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해 들어 템플턴자산운용(템플턴)이 휠라코리아 지분을 꾸준히 매입, 12.93%의 지분으로 최대주주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가운데 4%가량의 지분이 ‘투자일임고객 주식’으로서 템플턴의 순수 보유 지분이 아니지만 향후 지분을 늘린다거나 경영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지난 1월 20일 템플턴은 지분 매입을 공시하면서 보유 목적으로 “투자 시점에는 경영에 영향을 미칠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경영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또 “이사를 지명할 의도는 갖고 있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보고자(템플턴)가 적임자라고 판단하는 이사 후보자를 지지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혀 추가 지분 매입이 ‘단순투자’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쉰들러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월부터 유상증자를 진행할 예정인 현대엘리베이터는 쉰들러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진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도 해결해야 한다. 쉰들러 측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진이 현대상선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업과 무관한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맺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고 주장하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