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부 초안 보고 부글… ‘이것들을 확!’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지난 2월 27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어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브리핑하던 도중 꺼낸 말이라고 한다. 1시간여 전에 자신이 설명했던 것을 무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브리핑 주제는 25일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대국민 담화 내용과 앞서 기획재정부가 엠바고(보도유예) 시한을 정해 기자들에게 사전 배포했던 보도자료 내용이 불일치하게 된 원인이었다. 이런 중요한 사안에 대해 ‘청와대의 입’이자 넓게 보면 ‘대한민국의 입’이라고 할 수도 있는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 시도한 것이다.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쯤 되면 대변인의 굴욕”이라는 평가가 오갔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1주년인 2월 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담화문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기획재정부의 초안이 상당 부분 수정된 것과 관련, 향후 현오석 경제팀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한 출입기자는 “보안의식만 강할 뿐 언론과 소통할 줄 모르는 현재의 청와대에서 민 대변인은 그나마 기자들에게 소소한 정보라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이런 민 대변인이 조금씩 쌓여 가던 신뢰를 일거에 무너뜨릴 수도 있는 굴욕적인 상황을 맞은 이유는 뭘까. 원인 규명은 우선 이날 있었던 두 번의 브리핑이 내용 면에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피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7일 오전 7시 30분쯤 있었던 브리핑에서 민 대변인은 ‘기재부 초안이 도착한 이후 대통령 발언 형식을 대국민 담화로 바꾸고 청와대가 직접 키를 쥐는 것으로 바뀐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렇게 바뀐 건 사실”이라고 답했다. 민 대변인은 한 발 더 나아가 “기재부에서 초안이 뿌려졌을 때 기자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며 “그런 얘기를 듣고 전달 방식을 바꾸는 게 어떠냐는 논의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처음에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를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할 것으로 알려진 이유에 대해서는 “대통령에게 보고 안 된 상태에서 부처가 미리 발표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불과 1시간 30분쯤 뒤 민 대변인의 설명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는 “아침에 준비 안 된 상태로 답했는데 취재를 해 본 결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 방식으로 대통령은 처음부터 담화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의 생각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모두발언 등) 여러 가지 형식이 검토될 수 있을 수 있겠지만, 대통령 생각은 원래부터 담화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며 “청와대와 기재부 사이에 갈등이 있거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내용은 정반대였지만 민 대변인의 ‘최초 브리핑’과 ‘정정 브리핑’ 모두 목적은 하나였다. 박 대통령이 기재부에서 올린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초안에 대해 실망해 직접 전면적인 조정을 했고, 이 때문에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의 실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언론 보도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 대변인이 “대통령이 (현 부총리에게) 역정을 냈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고 그런 사실도 없었다”면서 “실체가 없는 청와대-부처 갈등설은 그만 기사화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민 대변인은 정정 브리핑을 통해 혼선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겠지만, 이번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준비와 발표 과정을 쭉 지켜 본 이들은 “오히려 최초 브리핑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최초 브리핑 내용이 이전의 청와대 및 기재부의 설명과 더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는 “대통령의 담화 발표 하루 전인 24일까지도 민 대변인은 ‘일단 대통령은 회의 모두발언을 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형식을 바꾸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었다”고 전했다. 기재부에 출입하는 다른 기자도 “24일 저녁까지도 25일 낮 12시에 현 부총리 등 장관들의 합동 브리핑이 있는 것으로 일정이 공지돼 있었다”고 전했다.
이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당초 시나리오는 ‘오전 10시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 낮 12시 장관 합동 브리핑’으로 돼 있었고, 박 대통령은 10시에 시작되는 회의를 주재하면서 모두발언을 하는 것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이 시나리오는 24일 오후까지도 유효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할 계획이었다는 민 대변인의 ‘정정 브리핑’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는 얘기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하지만 이날은 원고를 제대로 한 번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생중계가 시작됐다. 한 방송사 기자는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오퍼레이터의 오타가 그대로 생중계 자막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다”며 “방송사고가 안 난 게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기재부 기자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 19일 사전 배포됐던 보도자료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박 대통령의 담화에서 누락됐고, 새롭게 추가된 것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불일치에 대해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 기자는 “약 60페이지 분량의 사전 보도자료는 요약본에 불과했고, 300여 페이지 분량의 원본은 25일 배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통령 담화가 다 끝나도록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는 원본은 배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담화 내용과 기재부가 준비했던 보도 참고자료 내용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바람에 빚어진 혼란이었다. 이 기자는 “기재부 요약본, 기재부 원본, 대통령 담화 원고, 대통령 담화에 기초해 다시 정리한 40여 페이지 분량의 보도자료, 네 가지 버전이 있었던 셈”이라며 “담화에서 빠진 정책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장관들조차 대답을 못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역시 대국민 담화 때 애를 먹었다. 프롬프터(자막 재생기)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지 여러 차례 인상을 찡그렸고 담화문을 읽는 흐름도 종종 끊겼다. ‘혁신’을 ‘확산’으로, ‘적극적’을 ‘전국적’으로, ‘높여’를 ‘늘려’로, ‘체계’를 ‘제도’로 잘못 읽기도 했다. 준비해 온 원고를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던 종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 혼란은 모두 박 대통령의 담화문 원고가 너무 늦게 작성된 데 기인한 것이다. 이는 담화문에 담길 내용, 즉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뒤늦게 확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민 대변인의 설명처럼 청와대와 기재부 간에 이견도 없었고 원활한 소통이 이뤄졌다면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을 혼란들이다.
한 새누리당 의원은 “청와대 참모들, 경제부처 장관들이 대통령의 의중을 얼마나 잘못 읽고 있는지가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죽 답답했으면 대통령이 직접 정책을 넣고 빼고 했겠느냐”며 이들의 무능을 탓했다. 이 의원은 “임기 4년을 남겨둔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 때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은 곧 자신의 임기 내에 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라며 “그런데도 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실행계획을 대통령께 보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큰 혼선이 빚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지적은 이번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발표를 계기로 현오석 부총리 등 경제팀에 대한 물갈이 여론이 다시 불붙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박 대통령의 소통 부재가 한계점을 노출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관통하는 그랜드 플랜을 발표하기 수십 분 전까지 원고를 뜯어고치고 계획을 수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만기친람(萬機親覽) 리더십’으로 봐 넘길 사안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현오석 부총리 등 정부부처 경제팀뿐 아니라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조원동 경제수석 역시 박 대통령과 소통이 안 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라며 “박 대통령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 고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4년 내내 이번과 같은 혼란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