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명박 정권 실세들 ‘사정권’
검찰이 강덕수 전 회장의 배임 및 횡령 혐의를 수사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수사가 정·관계로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침몰하는 배는 합성. 연합뉴스
우선 검찰은 현 경영진이 의뢰한 강 전 회장의 2400억 원가량의 배임 혐의를 규명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강 전 회장은 STX중공업이 계열사 연대보증 및 기업어음 매입을 해주는 방식으로 약 1000억 원을 부당하게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검찰은 중국 법인 STX대련이 현지은행에서 1조 5000억 원을 차입할 당시 STX중공업에서 1400억 원을 지급보증 선 것도 강 전 회장의 배임인지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STX 수사에 대해 검찰은 “STX 정상화를 위해 수조 원대 추가 자금 지원이 예상되는 상황이라 신속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채권단 및 STX 측이 강 전 회장 수사를 의뢰해 와 움직였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 서초동 주변에서 이번 수사가 강 전 회장 비자금은 물론 정·관계 로비로까지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대두되자 검찰이 진화에 나선 것이다. 검찰은 공식적으로 “지금까지는 경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와 관련된 수사”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검찰 안팎에선 강 전 회장 배임 수사를 ‘몸 풀기’ 성격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검찰이 지난해 중반부터 STX 내사를 꾸준히 진행하며 상당한 양의 ‘강덕수 파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는 “강 전 회장 수사는 시기만 저울질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지난해 상당 부분 채비를 끝냈다. STX 측 의뢰는 수사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라고 보면 된다”면서 “수사팀이 그동안 대검 등에서 모았던 첩보와 자료들을 모두 가지고 왔다. 100m 결승점에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진 두고 보면 알 것”이라고 귀띔했다.
청와대 사정라인이 수사 착수 직전까지 검찰과 긴밀하게 협의를 했다는 얘기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기업 수사로 끝날 사안은 아닐 것이란 전망과 맞물리는 까닭에서다. 앞서의 서울중앙지검 고위 인사는 “통상 대기업 수사는 청와대와 협의를 거치긴 한다. 그런데 STX의 경우 지난해부터 청와대가 많은 관심을 표명했고, 사실상 (재가를) 받아서 검찰이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면서 “이는 정권 차원에서 어떤 정치적 노림수가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되는데 수사 역시 그 쪽으로 흘러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일요신문>이 접촉한 여권 핵심부 관계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검찰이 STX 수사를 독단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 2년차를 맞아 기업 수사를 자제하고 경제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이 청와대와의 조율 없이 STX를 칠 수 있겠냐는 얘기였다. 금융권 일각에선 STX 측을 상대로 강 전 회장 수사 의뢰를 요구했던 채권단 배후에 정부가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다. 청와대는 정권 초 수집했던 STX 계열사 입찰 관련 자료들 중 일부를 검찰에 이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를 종합해봤을 때 검찰의 1차 타깃은 강 전 회장이 조성한 비자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사팀은 빠른 시일 내에 이 부분에 대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 비록 수사 초반이긴 하지만 그동안 준비를 탄탄히 해왔기 때문이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취임 후 줄곧 특수수사 패러다임 전환을 강조하며 광범위한 압수수색 및 무차별 소환을 지양하라고 주문해 왔다. 기소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여문 사건에 대해서만 수사를 착수하라는 것이었다. 특수2부가 강 전 회장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출국금지 조치를 한 것을 놓고 혐의 입증이 어느 정도 끝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이다.
‘강덕수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 대부분은 이명박 정부 때 고위직에 재직했던 이들이다. 2010년 청와대에서 열린 카빌라 콩고 대통령을 위한 국빈만찬에서 이 대통령과 강 전 회장이 악수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사정당국 주변에선 검찰이 강 전 회장 ‘검은 돈’의 흐름에 대해서 쫓다보면 자연스레 정·관계로까지 수사가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강 전 회장이 10년 넘게 사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로비용으로 비자금을 썼을 것이란 얘기다. 검찰은 공식적으로 “(정·관계 로비는) 아직 수사 대상 아니다”라며 부인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와 관련된 내용들에 대해선 수사 착수 이전부터 내사를 진행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강 전 회장 비자금을 파헤치는 것을 전초전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요신문> 취재결과 검찰 내부에서 거론되는 이른바 ‘강덕수 리스트’ 대부분은 이명박 정부 때 고위직에 재직했던 인사들이었다. 여기엔 금융권의 대표적인 친 MB계 인사 한 명, 실세로 통했던 고위 공무원, 이 전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재계 인사, 친이계로 분류되는 새누리당 현직 의원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강 전 회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금품을 받고 STX 사업에 도움을 줬던 정황이 일부분 드러났다고 한다. STX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8년부터 급격하게 그룹 규모가 늘어난 바 있다. 또 민주당 중진급 정치인 두 명도 명단에 올라 있었다. 검찰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들도 강 전 회장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검찰이 지난 정권은 물론 노무현 정부까지 겨누고 있는 것에 대해 여권 핵심부는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듯한 기류가 역력하다. 정치권에선 박근혜 정부가 ‘꽃놀이패’를 쥐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검찰 수사에 따라 여권 주류 친박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친이계는 물론 야권의 강력한 정치세력 친노가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한 여권 관계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 수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할 분은 아니다”라면서도 “어찌됐건 STX는 지난 정권에서 비호 의혹이 나돌았던 기업이다. 따라서 정·관계로 수사가 확대되면 친이계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친박 입장에선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강덕수 전 회장은 누구? ‘샐러리맨 신화’ 금융위기에 난파 지난 2001년 5월 2일 창원시 쌍용중공업 엔진공장 사무실 앞에서 열린 STX그룹 출범식에서 강덕수 전 회장은 떨리는 마음으로 단상 위에 섰다. 이 자리에서 강 전 회장은 “오늘은 쌍용중공업이 주식회사 STX로 거듭나는 영광스러운 날”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쌍용중공업의 ‘월급쟁이 대표’였던 강 전 회장의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1973년 쌍용양회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강 전 회장은 뛰어난 재무능력을 인정받아 승진가도를 달렸다. IMF 외환위기 당시 모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갔지만 쌍용중공업을 인수했던 외국계 컨소시엄에 의해 최고경영자로 발탁됐다. 2001년 쌍용중공업이 매물로 나오자 강 전 회장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회사를 사들였다. ‘오너’가 된 강 전 회장은 인수합병 등을 통해 그룹 덩치를 불렸다. STX중공업 출범 첫해인 2001년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2002년엔 산단에너지(STX에너지)를 인수했다. 2004년엔 범양상선(현 STX팬오션)을 인수하며 조선과 해운 부문 계열화를 완성했다. 2005년에는 STX건설을 설립하며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2007년에는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글로벌 크루즈선사 야커야즈(현 STX유럽)를 인수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M&A(인수합병)의 귀재’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강 전 회장이 계약서 사인 후 “내가 정말 엄청난 일을 저질렀구나”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STX는 2008년 재계서열 15위(공기업 제외)에 오르며 처음으로 20위권 안에 들기도 했다. 지난해 STX 순위는 13위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강 전 회장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피해가지 못했다. 주력사업인 해운과 조선이 불황을 겪으며 그룹 전체가 유동성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강 전 회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지난해 3월 STX팬오션 공개매각을 추진하면서 부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지난해 핵심 계열사 STX조선해양이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 개선)에 버금가는 채권단 자율협약 체제로 전환됐고, STX건설도 법정관리를 받게 됐다. 이어 STX중공업과 STX엔진도 뒤따라 자율협약을 맺게 됐고 STX팬오션마저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사실상 그룹이 공중분해됐다. 강 전 회장은 또 다시 사재를 모두 출연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순 없었다. 현재 강 전 회장은 STX엔진 이사회 의장과 STX장학재단 이사장 직함만 맡고 있을 뿐 그룹 경영에선 완전히 손을 뗀 상태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