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1일 타계한 김형목 해청학원 이사장 빈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한때 ‘서울 강남땅의 절반은 김씨 소유’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적어도 부동산가에서는 신화적 존재였다. 그럼에도 정작 그의 이름은 세간에 그리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아들인 김택 전 영동백화점 사장이 더 유명했다. 그 이유는 김택 사장이 몇 차례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돼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으며 언론에 오르내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김 이사장은 70~80년대 ‘강남 개발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부동산가에서는 유명했다. 그런 그의 사망은 ‘강남 부동산붐 1세대’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가 있다. 김형목 이사장의 작고를 계기로 한국 최고의 요지인 강남 부동산 붐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강남은 대부분 논밭이었다. 그런 강남은 김형목 이사장 등 몇몇 부동산 큰손들에 의해 한국에서 가장 가치있는 땅으로 변했다. 강남의 요지를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돈방석에 앉은 것은 당연한 일.
김형목 이사장이 주로 가지고 있던 강남 땅은 현재 강남구청이 있는 삼성동과 압구정동, 그리고 대치동 일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동백화점이 있던 곳도 김 이사장의 땅이었다.
건설업계에는 김 이사장과 더불어 강남 개발붐을 타고 돈방석에 앉았던 이너서클로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이라는 조직을 든다. 강남 땅부자들이 모여 구성한 이 조합의 구성원들은 주로 대치동, 양재동, 도곡동, 개포동 일대의 땅을 갖고 있었다.
이 조합 구성원의 공통점은 대부분 북한 출신. 이들은 피란온 뒤 남대문시장에서 포목장사나 지물포, 화공약품 도매상 등으로 돈을 벌었다. 그 후 60년대 초 제지회사나 직물회사 등과 손잡고 일종의 투자그룹인 조합을 만들어 강남 땅을 마구 사들였던 것이다.
그후 10년이 흐른 뒤 박정희 정권은 서울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남지역 개발에 나섰다. 70년대 초의 일이었다. 강남 개발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의 노른자위를 독식하고 있던 지주들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렸다.
당시 장한평농지개량조합이 주축이 된 강남 땅부자들의 면면을 보면 김형목 이사장을 비롯, 이준영 대유 명예회장(89), 윤장섭 성보문화재단 이사장(81),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80), 조봉구 전 삼호그룹 회장(84), 윤도한 강남대 이사장 등이 었다.
이들은 강남 일대의 땅을 사들일 때 정해진 대리인을 통해 공동 명의로 사들이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등 끈끈한 팀워크를 과시했다.
김 이사장은 남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통해 돈을 모아 땅 투자에 ‘올인’했던 경우고, 김 이사장보다 두 살 아래인 이준영 대유 명예회장은 마산방직을 경영했던 인물. 충청도 출신인 이 명예회장과 김 이사장은 나중에 처남 매부로 맺어진다. 이 명예회장의 여동생인 이정례씨가 김 이사장의 부인. 또 김 이사장보다 열한 살 아래인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은 김 이사장과 강남개발(주)를 설립, 회사를 공동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 중 대부격은 김형목 이사장이었다. 김 이사장의 땅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한때 “강남구청 일대를 지나가려면 김 이사장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실제 청담동 강남구청 인근에는 그가 지난 70년대 초 지은 영동고와 그가 땅을 희사한 북청군민회관이 있다. 또 83년에는 강남구청 네거리 부근의 땅에 영동백화점을 지을 정도였다. 그는 이외 대치동 일대에도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청실아파트나 신해청 등이 바로 그의 땅에 지은 아파트들이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법상 나대지를 팔 경우 양도소득세를 많이 물게된다. 때문에 이들은 그 땅에 믿을 만한 건설업자를 골라 아파트를 지어 팔았다. 청화기업이 지은 청실이나 신해청 등이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그러나 김 이사장의 위력은 70년대 말로 끝난다. 김 이사장의 둘째 아들 김택 유화상사 대표(45)가 등장하면서부터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화가 있다. 김 이사장은 주로 개인명의로 땅을 사뒀다. 이중 당시 미성년자였던 김택씨 명의로 가장 많은 땅을 사뒀다는 것. 하지만 김택 사장이 21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인감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 김 이사장이 크게 당황했다는 것. ‘어린 아들’의 명의로 부동산 거래를 해왔던 김 이사장으로선 예상치 못한 문제였다.
이로 인해 부자지간에 불협화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인감권자가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겠다는데 김 이사장도 손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김택 사장은 지난 83년 소유하고 있던 땅에 영동백화점을 짓고 경영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김택 사장이 김 이사장의 세 명의 아들 중 유독 부동산이 많았던 것은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공개됐던 개인별 종합토지세 순위에서 해마다 10위 안에 드는 고액납세자였다는 점에서도 증명된다.
김 사장은 90년대 초반 3년 동안 세 가지 형사사건에 연루되는 등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또 영동백화점도 지난 94년 나산에 매각하면서 제도권 경제에서 그의 모습을 찾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김 사장을 아는 사람들은 “김 사장이 지독한 구두쇠로 세간에 알려진 모습보다 훨씬 더 건실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90년대 초반의 스캔들은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생긴 실수’라는 것. 그는 지금도 강남 부동산 황제의 2세라는 명성에 걸맞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강남구 전경. 임준선 기 자 kjlim@ilyo.co.kr | ||
마산방직 등을 운영하면서 초기 자본을 형성했던 그는 부동산 투자 이외에 증권업에도 진출했다. 94년부터 98년까지 대유증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지난 98년 대유증권을 매각한 뒤에는 대유 명예회장으로 지내고 있다.
이 명예회장과 비슷한 케이스로 윤장섭 성보문화재단 이사장을 꼽을 수 있다. 윤 이사장은 사채시장과 서울 영동지역 부동산 투자로 성공해 유명해졌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자리가 바로 윤 이사장의 땅이었다. 한보의 정태수 회장에게 이 땅을 넘겨 은마아파트가 들어선 것. 또 타워팰리스가 들어서면서 초고가 아파트 숲으로 변한 도곡동 일대도 과거 전투경찰 훈련장으로 빌려주던 윤 이사장 땅이었다.
윤 이사장은 개성 출신으로 김 이사장처럼 실향민이다. 또 벌어들인 부를 성보고등학교, 성보문화재단 설립 등 교육사업이나 문화재단 설립 등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게다가 그는 유화증권이란 탄탄한 중견 증권회사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대유 명예회장인 이준영 명예회장과 비슷하다.
이 부분은 장한평농지개량조합 회원들이 비슷한 사업모델과 인생모델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보인다. 윤 이사장도 팔순이 넘은 고령이라 성보화학은 큰아들인 재천씨에게, 유화증권은 넷째아들인 경립씨가 사장을 맡고 있는 등 2세체제로 들어갔다. 부동산에서 출발해 제도권에 안착한 셈이다.
장한평농지개량조합 멤버 중 가장 ‘안풀린’ 사람은 조봉구 전 삼호그룹 회장이다. 조 전 회장은 경남모방을 운영하다가 부동산 투자로 떼돈을 번 경우. 조 전 회장은 부동산 투자로 번 돈을 밑천 삼아 건설업에 뛰어들어 삼호개발, 동광기업 등을 통해 개나리아파트, 진달래아파트 등을 지으며 건설회사 오너로 변신했다.
그는 땅 매매보다는 갖고 있던 땅을 통해 기업가로 변신했지만 90년대 초 부도가 났다. 조 전 회장이 갖고 있던 땅 중 대표적인 곳은 역삼역 부근의 한국은행 자리.
한보그룹 정태수 전 회장이 윤장섭 이사장의 땅으로 일어섰다면 조 전 회장의 땅으로 일어선 대표적인 기업은 그랜드백화점의 김만진 회장으로 알려졌다. 조 전 회장의 땅을 빌려서 분양에 성공해 기업가로 입신한 것.
실제로 김 회장은 자신의 이력에 슈퍼마켓 운영 경력을 집어넣고 있다. 그때 부동산 중개업에도 관여했다는 것. 이런 인연으로 조 전 회장과 연이 닿아 건설업에 손을 대 기업가로 입신했다는 얘기다.
장한평농지개량조합 출신 중 윤도한 강남대 이사장은 멤버들 중 가장 땅이 적은 편에 속한다. 다른 멤버들이 수십만 평이었다면 그는 고작 수천 평이었다. 하지만 그는 회원들이 땅을 사고 팔 때 창구노릇을 독점했다. 지주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것. 때문에 거래 때마다 그에게 적지 않은 몫이 따로 돌아갔다고 한다.
과거 대치동에 있는 김형목 이사장의 땅을 사들여 청실아파트를 지었던 청화기업 관계자는 “그 땅을 사려했더니 김 이사장이 윤도한씨를 대리인으로 지목해 꼭 그를 통해서야만 땅을 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지주인 김 이사장도 거래에서 그의 몫을 따로 인정해 중개료도 두둑했다는 것. 또 윤 이사장도 장한평농지개량조합 멤버들이 땅 투자를 할때 수백~수천 평씩 함께 투자해 짭짤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윤 이사장의 과거는 베일에 가려있다. 다만 ‘뚝섬에서 배타고 압구정동 가던 시절 압구정 일대의 과수원을 관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김형목 이사장이나 윤장섭 이사장 등과의 만남이 현재의 그를 만든 셈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윤 이사장은 70년대 초 도곡동에 있던 신학교를 인수해 강남대학이라는 종합대학교로 만드는 등 학원사업으로 방향을 틀어 성공했다.
또다른 멤버인 전재준 삼덕제지 회장은 60년대에 김형목 이사장과 삼덕제지와 강남개발을 공동운영했던 동업자.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실향민인 그는 지금도 전공인 제지분야에서 삼덕제지를 이끌고 있다.
최근 그는 경기도 안양시 구시가지의 금싸라기 터에 있는 시가 3백억원 상당의 삼덕제지 공장 터를 안양시에 공원으로 기증하는 등 부의 사회환원을 실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장한편농지조합 멤버 중 조봉구 삼호그룹 회장을 빼고는 대부분 큰 부를 축적했다. 이들과 거래했던 한 재계인사는 “김 이사장이나 윤 이사장 등은 개인재산과 회사 재산을 엄격히 구분해 따로 관리했다”고 말했다. 또 ‘땅으로 얻은 부의 수성’에 성공한 이들은 땅을 팔면 그만큼의 땅을 새로 사들여 땅에 투자하는 철칙을 갖고 있었던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부동산 투자로 시작한 장한평농지개량조합 출신의 강남 땅부자들은 강남개발 30여 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재벌 부럽지 않은 부의 축적에 성공했고 2세에게 넘겨줄 채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땅으로 큰 돈을 얻은 뒤 학교나 문화재단, 장학재단 설립 등으로 사회에 부를 환원하는데도 신경을 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부분이 있다. 이들이 어떻게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강남개발지로 점찍은 예정지역만 귀신같이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느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운이 억세게도 좋았다”는 시각도 있지만, “관련 정보를 남보다 빨리 입수하는 특별한 루트를 따로 관리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 신도시개발 후보지가 줄줄이 공개되고 있어 20년 뒤 어떤 미지의 얼굴이 땅부자로 등장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