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몽구 현대차 회장(오른쪽)이 지난 4일 고 정몽헌 회장의 빈소를 찾은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위로를 받으며 침통 한 표정을 짓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
왕자의 난 당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과 대북사업의 승계자로 정몽헌 회장을 낙점했고,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그룹 계열사를 갖고 독립했다. 이후 두 형제의 사이는 냉랭했다. 정몽헌 회장이 대북 사업 문제로 인해 난관에 부닥쳤을 때에도 정몽구 회장이 애써 외면함으로써 두 형제는 사실상 남남처럼 지내왔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이 사고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벌써 현대가 주변에서는 정몽구 회장을 주목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 역시 사고 뒷수습을 위한 집안 회의를 주도하는 등 집안 큰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구심점을 잃은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정몽구 회장이 이끌고 있는 현대차그룹으로 재편되지 않을까 하는 시선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것.
물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정리가 끝난 상황이다. 사실상 정몽헌 회장이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은 채권단에 넘어간 상황이고, 정몽구 회장으로서도 이 계열사에 대해서는 자기 선택의 몫이 없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현대차와 현대그룹간의 지급 보증 등도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현대그룹 계열사에 진 지급보증이 불거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 99년 현대아산에 약 5%의 지분을 출자했으나, 이미 이에 대해서는 시장의 평가가 반영돼 있다는 것.
또 현대차가 현대상선에 대해 직접 지급보증을 선 4천2백여억원, 현대모비스가 현대상선에 보증 선 5백여억원 등도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설명이다.
문제로 남은 것은 고 정주영 회장에 이어 정몽헌 회장이 강력히 추진해왔던 대북 사업이다. 정몽헌 회장은 공개된 유서를 통해 대북사업에 대한 지속적인 의지를 내비쳤다. 정 회장은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남긴 유서에서 “대북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달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대북사업이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이 생애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숙원 사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김윤규 사장이 아닌 현대가의 핏줄이 이 사업을 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시선도 던지고 있다.
결국 정몽구 회장으로서는 현대가의 적통임을 내세워 선친의 사업을 맡을 것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선 셈이다. 여태까지 정몽구 회장은 대북 사업과 관련해 늘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왔다. 현대차는 공식적으로 “대북사업에 우리를 자꾸 연관시키지 말아달라”며 이 사업에서 한발짝쯤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정주영 창업자의 뜻을 받들어 대북 경협사업에 나섰던 정몽헌 회장이 사라졌다. 정 회장이 사라진 마당에 현대아산은 물론, 현대그룹도 대북사업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차다.
그렇다고 이미 수조원을 쏟아부은 현대그룹에서 대북 경협사업 주도권을 내놓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은 전혀 별개의 그룹이 됐다.
▲ 정몽구 회장(왼쪽)이 고 정몽헌 회장의 빈소에서 장례준비 를 꼼꼼히 챙기고 있다. | ||
만일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본류’격인 대북 사업을 계승한다면 고 정주영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명실상부한 현대가의 적통을 잇는다는 것을 공표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는 대북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이 수조원대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차로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는 셈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모든 것을 떠나 우리가 대북 사업을 맡을 정도로 여력이 없다”며 일부의 추측에 대해 잘라 말했다. 그러나 정 회장이 대북 사업을 맡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현대’라는 이름 자체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시각이다. 그동안 현대가의 적통임을 주장해왔던 현대차로서는 ‘범 현대적’인 명분이 없어지는 셈이다.
여기에 정몽구 회장의 고민이 있다.
이에 대해 일단 현대차측은 “모르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지금은 대북 사업 문제 등을 운운할 시점이 아닌 것 같다”며 “그러나 우리가 (대북 사업을 맡을 만큼)여력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대북 사업을 하지 않는다고 봐도 되느냐”는 질문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묻는 것이라면 아직 모르겠다는 정도로 해달라”며 한발 물러섰다.
이는 여태까지의 상황과 평소 정 회장의 얘기로 미뤄보자면 ‘절대 불가’의 입장이지만, 현재는 상황이 변한 만큼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러나 정몽헌 회장의 자살 소식이 전해진 직후 현대차는 다른 현대 계열사들과 마찬가지로 주가가 하락했다. 지난 4일 현대차의 주가는 전날보다 -1.54% 빠진 3만5천2백원으로 마감됐다.
한 증권가 관계자는 “이는 현대차의 해결되지 않은 노사문제, 내수 부진 등으로 인한 외국인의 집중 매도세가 주요 원인이었다”며 “그러나 외부에서 현대차를 바라보는 ‘일말의 불안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전했다.
‘일말의 불안감’에는 돈이 안되는 대북사업을 맡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포함된다. 대북 사업에 뛰어들 경우 현대차 계열사들이 줄줄이 휘말리며 제2의 현대그룹이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
아마 정 회장이 동생의 시신 앞에서 눈물을 떨군 이면의 내막에는 동생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주고 싶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형의 심정도 담겨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