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증인 사고 현장 서둘러 정리 왜?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증거조작 의혹이 점점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 국정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검찰이 과연 의혹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을까. 일요신문DB
검찰과 국정원은 이 문서에 대해 “증거조작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최근 검찰 진상조사팀의 의뢰로 문서 감정이 이뤄진 후 문서에 찍힌 도장이 위조된 것으로 판명나면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은 국정원이 넘겨준 자료를 충분히 확인한 후에 법원에 제출했다는 입장이고, 국정원 역시 직접 문서를 조작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김 씨가 국정원과 검찰의 ‘책임 떠넘기기’의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 씨. 연합뉴스
검찰은 김씨가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하는 등 신병확보에 나섰지만, 김 씨의 소재를 파악하는 데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검찰이 소재를 파악한 것은 이날 이미 김 씨가 서울시내 한 모텔방에서 자신의 목을 칼로 그은 채 쓰러진 뒤였다. 김 씨는 자살 당시 ‘국정원, 국조원’이라는 글자를 자신의 피로 모텔방에 적어 ‘다잉 메시지’를 남겼다. 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노트에 글을 적어 유서도 남겼다. 하지만 피로 적은 글씨는 이미 지워진 상태고, 유서 역시 검찰이 회수해 내용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선 경찰의 진술 등을 종합해보면 김 씨는 ‘국정원에서 2개월 봉급 600만 원과 가짜서류제작비 1000만 원을 받을 게 있다, 유우성은 간첩이 분명하니 증거가 없어 처벌이 불가능하면 추방하라’는 내용을 적었다. 국정원의 중국 현지 협조자 역할을 했던 김 씨가 ‘가짜서류제작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국정원이 김 씨에게 문서조작을 지시 또는 의뢰를 했다는 의심이 강하게 드는 대목이다.
일부에서는 김 씨가 검찰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의 증거조작 개입을 ‘발설’한 것이 자살시도의 원인이 아니겠냐는 분석을 내놓는다. 국정원이 증거조작 책임을 김 씨가 떠안기를 바라는데, 이런 취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김 씨가 검찰 조사과정에서 국정원 개입사실을 진술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한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김 씨가 어떤 취지의 진술을 했는지 ‘수사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유언장을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확보하지 않고 검찰이 손에 쥔 채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도 의문이다. 검찰은 유언장을 현장에 나간 경찰이 김 씨의 아들에게 줬고, 아들이 다시 검찰에 전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왜 아버지의 유언장을 검찰에 전달했는지는 석연치 않다. 현재 유언장 내용은 언론 등을 통해 보도되고 있으나, 경찰과 김 씨의 가족을 통해 얻은 정보를 취합해 알리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은 “김 씨 본인이나 가족의 동의가 없는 한 유언장을 공개할 수 없다”며 공개를 미루고 있다. 알려진 대로 유언장에 김 씨가 국정원을 원망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점은 검찰이 사실상 국정원이 해명할 시간을 벌어주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후송되는 김 씨의 모습으로 KBS뉴스 캡처 사진.
검찰은 ‘수사’가 아닌 ‘조사’를 하는 상황에서 구속영장이나 체포영장을 발부할 수 없기 때문에 김 씨의 신변안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김 씨가 국정원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올바른 진술을 할 수 있으려면 검찰이 나서서 신병확보를 하거나, 최소한 비상연락망은 구축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김 씨는 국내에 마땅한 거처를 두지 않고 모텔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살시도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점도 의문이다. 김 씨가 병원으로 후송된 직후 경찰은 모텔 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서 각종 감식을 마친 후 청소를 허락했다. 당시 상황으로는 경찰이 김 씨가 국정원과 관계된 인물인 줄을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목에 자상을 입고 쓰러진 김 씨가 살아있을지 불확실하고, 정황상 타살의혹을 배제할 수 없는 단계였다.
하지만 경찰은 살인사건 현장이 될 수 있는 곳을 단 몇 시간 만에 출입통제를 풀고 청소를 허락했다. 김 씨가 자신의 피로 남겼던 글자는 언론에 공개되거나 검찰이 감식하지 못하고 사라진 셈이다. 김 씨가 입을 열기 전에는 현장에서 사라진 게 피로 쓴 글씨 외에 더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초동수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바로 현장을 통제해 장기간 증거 등 정황을 유지하는 것은 경찰의 기본업무 패턴인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검찰은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를 하거나 현장에 간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진 국정원 협력자 김 씨의 병실 앞에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검찰은 각종 정황을 무시한 채 조사를 진행해왔다. 중국에서 문서가 위조됐다는 공문을 보냈는데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문서감정을 진행했고, 중국과 사법공조를 요청했지만 중국정부가 자신들이 위조라고 한 문서를 재확인하겠다고 하는 우리나라 검찰의 요구를 들어줄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검찰이 이처럼 소극적인 자세로 수사를 진행하며 시간을 끌게 된다면 그만큼 국정원은 증거인멸이나 말맞추기를 할 여지도 커진다. 증거조작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김 씨가 입원을 핑계로 장기간 조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유우성 씨에 대한 증거조작사건은 미궁으로 빠질 우려도 있다.
검찰은 진상조사팀을 ‘수사팀’으로 전환해 앞으로 강제수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병원에 입원한 김 씨가 국정원 관계자들과 대질신문을 하게 되면 수사는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국정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검찰이 이번에는 제대로 수사를 할 수 있을지 지켜봐야할 대목이다.
이선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