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이 ‘암 덩어리’ 키웠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 ‘암 덩어리’를 키운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개입 사건’을 일으킨 국정원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과 인적쇄신을 단행하지 못해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라는 더 큰 화를 불러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지난해 8월 2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해결을 촉구하는 국민촛불대회. 최준필 기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여권 관계자들조차 당혹감을 표하며 이 같은 반응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취임 직후 대선개입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국가정보원을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방어해 줬는데, 그게 결국 부메랑이 돼 박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줬다는 얘기다. 상당수 여권 관계자들은 국정원이 증거 부족을 증거 조작으로 덮으려 했다는 사실에 경악해 하면서 배신감까지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발등을 찍혔다 해도, 암 덩어리를 키웠다 해도 결국 책임은 박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상식적인 비판 여론에도 귀 기울이지 않는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또 하나의 대형 사고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야권에서 자업자득이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박 대통령은 그동안 더할 수 없이 적극적으로 국정원을 방어해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적인 사례는 지난해 7월 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 발언이었다.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대선 과정에 문제가 됐던 국정원 댓글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의혹으로 여전히 혼란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국정원 댓글 의혹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실체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여야가 국정조사를 시작한 만큼 관련된 의혹들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한 후에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그 이후는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고 국민들을 위한 민생에 앞장서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야당을 중심으로 국회에서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하는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던 시점에 나온 박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남재준 국정원장 주도의 자체 개혁을 주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대선개입 사건 등에 대한 책임 추궁도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윗선 일부에만 국한됐을 뿐 실무자선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이는 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수뇌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인 의도를 가진 일부 국정원 고위 인사의 일탈 행위’ 정도로 치부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여권 핵심 관계자는 당시 사석에서 “정치적인 득실만 따진다면 대통령이 야당보다 더 세게 국정원 개혁을 주장하고, 국민들 앞에 국정원을 말 그대로 요절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면서 “하지만 그렇게 하면 누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겠느냐”고 반문했었다. 정치적인 논란을 이유로 중추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대공방첩 기능, 대외 정보 기능 등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이는 뒤집어 보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등 정치적인 논란과 상관없이 국정원 조직 자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스탠스는 공무원과 공조직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육법당(육군사관학교,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말이 부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박근혜 정부 들어 고시 출신과 군 출신 인사들의 약진은 특히 두드러졌다. 정홍원 국무총리와 남재준 국정원장,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 현 청와대 비서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박흥렬 경호실장 등 박 대통령과 수시로 얼굴을 맞대는 핵심 인사들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진에 고시 출신들이 대거 포진했다. 과거 정치인과 대선 캠프 출신들이 상당수 발탁됐던 외청장에 내부 승진 케이스가 적지 않았던 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최근에는 감사원장(황찬현), 방송통신위원장(최성준) 등에도 현직 법조인이 발탁됐다. 민간 전문가보다는 공무원공조직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이런 기조는 기업인 출신으로 공직사회를 극도로 불신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8월 16일 열린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진상규명 국정조사청문회에서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일요신문 DB
박 대통령의 공무원공조직 중시 스타일은 외부 행사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장교 합동임관식과 경찰대 졸업식 및 임용식에 모두 참석했다. 단지 행사에 참석한 데 그치지 않고 행사가 끝난 뒤에는 임관 장교, 임용 경찰 간부 등과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지난 3월 6일 계룡대에서 열린 장교 합동임관식에 다녀온 뒤 출입기자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행사가 끝난 뒤 기념촬영하는 장면이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박 대통령이 5600명이 넘는 임관 장교들을 24개 조로 나눠 “파이팅”을 외치며 일일이 기념촬영을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과 임관 장교들의 이런 적극적인 스킨십은 이전 정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어릴 적부터 청와대 생활을 한 박 대통령은 일종의 ‘제복에 대한 존중’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제복을 상징으로 하는 공무원들을, 국가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집단으로 여기고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공조직에 대한 존중과 신뢰는 국가수반인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이지만, 구시대적인 개혁 대상들까지 감싸고돌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국정원 사태를 통해 무분별한 공무원 감싸기의 폐해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암 세포가 발견됐을 때 도려내듯, 사고를 친 공무원과 공조직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개혁과 인적쇄신을 단행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 더 큰 화를 자초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한 정치 평론가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경우 국가 정보기관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국기문란 사건인데도 박근혜 정부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 일부를 단죄하는 선에서 봉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며 “평소 비정상적 관행의 정상화 개혁을 주장해 온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과 정반대로 국정원 문제를 다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평론가는 “비정상적인 정치공작을 일삼았던 국정원 직원들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력하게 단죄했더라면 이번과 같은 증거조작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며 “정권이 바뀌고 국정원장이 바뀌어도 제 자리를 지켜 온 국정원 내의 암적 존재들이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과 배치되는 비판과 조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남들이 다 비판할 때 같이 비판하는 것은 결코 포퓰리즘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며 “국정원 문제에 관한 한 대통령이 비판 여론에 더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등에 대해 여당에서도 ‘이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는 건의를 청와대에 수도 없이 올렸을 때에도 박 대통령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게 결국 박 대통령에게 큰 화로 돌아갔다”며 “앞으로의 국정운영 과정에서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서라도 주변의 비판과 조언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