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진엔 ‘안전띠’ 출연자엔 ‘올가미’
폐지 결정된 SBS <짝>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아래는 tvN <화성인 바이러스> 출연자 동의서.
<짝>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표방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에도 대략적인 개요를 담은 구성 대본은 존재한다. 내용은 출연진이 채우지만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한 기승전결과 설정은 제작진이 준다. 촬영된 내용이 모두 방송되는 것도 아니다. ‘편집’이라는 막강한 힘을 통해 특정 부분은 강화되고 나머지 부분은 제거된다. 때문에 출연진의 의도와 다르게 원치 않는 부분이 강조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버스커버스커라는 걸출한 그룹을 배출시킨 케이블채널 Mnet <슈퍼스타K 3(슈스케3)>. 당초 버스커버스커는 생방송 경연에도 진출하지 못했으나 이미 합격했던 예리밴드가 합숙소를 이탈하며 어부지리로 생방송 무대에 안착하게 됐다.
예리밴드는 “합숙 중 통신기기를 사용할 수 없어 외부와 단절돼 있다가, 새벽에 우연히 <슈스케3> 방송을 통해 비춰진 우리들의 모습을 접했다. 사실과 다르게 독단적으로 묘사된 팀의 모습에 충격받았다”며 편집조작을 지적했다.
결국 Mnet 측은 원본 영상까지 공개하며 진화에 나섰으나 <슈퍼스타K 1>에 참가했던 가수 김현지가 자신의 SNS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누구보다도 많은 공감을 합니다. 힘내세요”라고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이는 예리밴드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돼 ‘악마의 편집’이 또 다시 구설에 올랐다.
이처럼 방송은 결코 출연자 개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편집되지 않는다. 출연자 본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대중의 반응 역시 예측하기 어렵다. 때문에 일반인 출연자와 제작진 간 마찰은 종종 발생한다.
그럼에도 출연자들이 촬영을 거부하거나 방송 보류를 요구하지 못하는 건 ‘출연자 서약서’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출연자들이 사전에 서명하는 이 동의서에는 ‘출연자는 제작진의 지시에 응한다’ ‘위반할 경우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등의 내용이 통상적으로 포함된다.
<짝> 제작진 역시 2012년 출연자 중 한 명의 이력이 문제가 되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출연자 선정 과정에서 사전 프로필작성, 사전 인터뷰, 서류검증(학력, 직장, 혼인 관련), 서약서 작성 등의 과정을 통해 출연자에 대한 다단계의 검증 절차를 거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역시 일반인이 주인공으로 참여했던 tvN 인기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도 출연자에게 동의서를 받는다. 2012년 신경민 의원이 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출연자 동의서를 제출받아 살펴본 결과 13개 항목 동의서 중 5개의 항목에서 인권 침해 요소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 동의서는 출연자의 행위에 따른 명예훼손 발생 시 손해를 배상하고, 방송이 나간 내용이 모두 본인이 녹화장에서 언급하고 동의한 사실이라면서 이를 인터넷 및 기타 매체에 번복하는 글을 올릴 경우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Mnet <슈퍼스타K> 는 ‘악마의 편집’으로 시리즈 때마다 구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제공=Mnet
물론 제작진은 보다 투명한 방송을 만들기 위해 걸어놓은 ‘안전장치’라고 항변한다. 실제로 홍보나 기타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해 방송에 나오려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작가는 “사후 조치를 위한 서약라기보다는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사전 조치”라고 말했다.
이 작가는 “막상 방송이 나간 후 출연자의 사연이 거짓이며 방송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제작진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법적 조치’ 등의 문구를 담은 서약서를 미리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거짓 방송을 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며 “불순한 의도를 갖고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을 기웃대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 제작진으로서도 고육지책을 쓰는 것이다”고 토로했다.
결국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을 바라보는 제작진과 출연진의 시각차는 엄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일회성 출연인 만큼 그릇된 이미지로 각인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일반인 출연자와 단 한 번 출연시켜서 그들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 제작진의 입장은 상충된다.
확실한 건 <짝> 출연자 자살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은 돌다리를 두드리며 건너고 있다는 사실. 최근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이 대거 등장하며 방송사 내부적으로도 출연자 관리가 화두로 떠올랐다.
방송인 유재석이 진행하는 KBS 2TV <나는 남자다>는 남중, 남고, 공대 출신 남성들의 출연 신청을 받고 있고, 강호동이 MC로 나서는 MBC <별바라기> 역시 스타와 팬의 만남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이휘재가 진행하는 KBS 2TV 파일럿 프로그램 <두근두근 로맨스 30일>은 세 커플의 연애 과정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짝>을 떠올리게 한다.
MBC 예능국 관계자는 “사회적으로 쌍방향 소통이 중시되면서 일반인 출연 프로그램 역시 각광받고 있다. <화성인 바이러스>와 <짝> 등이 폐지되며 다소 주춤하고 있지만 일반인을 활용하는 프로그램은 계속 제작될 전망이다”며 “결국은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보다 명확한 가이드라인과 일반인 출연인 보호 방안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