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동네’로 이사…더디지만 차근차근
전국체전 전시종목이던 바둑이 10여 년 만에 시범종목으로 바뀌었다. 전국체전에서 바둑 경기를 펼치는 모습과 바둑종목 선수단 선서.
10여 년을 기다리면서 이제나저제나 하던 바둑계는 “이제 마침내 고비를 하나 넘었다”면서 큰 숨을 몰아쉰다. 전시종목으로 3년 정도 참가하다가 시범종목으로 가는 것이 통례인 것에 비추어 바둑은 신분 변경이 계속 지연되면서 그동안 애를 좀 태웠던 것이 사실이다. 대한바둑협회 산하 시·도협회가 해당 지역 체육회에 가입하는데 시간이 걸린 데다가 신규 종목에 문호를 개방하는 대한체육회의 심의 기준이 예전보다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전시종목(동호인종목)과 시범종목은 신분의 차이가 크다. 지금까지 전시종목 시절에는 대회 참가와 훈련, 경비 조달 등을 대한바둑협회와 산하기관이 감당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지자체와 전국체전 조직-집행위원회 등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 그동안 시범종목으로의 격상을 줄기차게 추진했던 한국기원-대한바둑협회 임직원과 기타 관계자들은 특히 고무되어 있다.
“그런 것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각 지역 교육청에 정식 바둑 팀 창설을 요청할 수 있게 되었고, 대학에 바둑 팀이 생길 경우, 바둑도 다른 체육종목처럼 체육특기자로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를테면 엘리트체육으로서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둑계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일자리 창출이다. “학교에 바둑 팀이 만들어지고 경쟁하게 되면 당연히 선수, 코치 감독 등이 필요할 것인데, 그 숫자만 해도 얼마냐”면서 기대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일각에는 신중론도 없지 않다. “아직 샴페인을 터뜨리기에는 이르다. 정식종목으로 확정될 때까지 좀 더 기다려 보아야 한다”는 것. “전시종목에서 시범종목으로 가는 데만 10여 년이 걸렸다. 대한체육회의 기준이 엄격해진 탓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10년은 너무했던 것 아닌가. 다른 체육종목들이 근본적으로 바둑을 보는 눈길이 호의적이지만은 않다는 반증의 의미도 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도 관건”이라는 얘기다.
“전국체전 정식종목에는 단체종목에 세팍타크로(동남아에서 즐기는 구기. 족구와 비슷하다) 소프트볼, 기록종목에 롤러스케이트 핀수영(추진장치와 호흡기 등을 갖추고 하는 수영) 산악, 체급종목에 우슈(武術, 중국의 전통 무예) 보디빌딩, 개인-단체종목에 볼링 스쿼시 당구 댄스스포츠 등이 들어가 있다. 이 가운데 볼링 당구 댄스스포츠는 인천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는 빠지고, 실내무도게임으로 치러진 종목들인데, 전국체전에서는 정식종목이다. 바둑도 그들과 함께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에는 빠졌는데, 전국체전에서는 이제야 시범종목이다. 바둑은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 3개를 독식한 효자종목이라고 자랑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것도 숙제다.”
“일자리 창출은 정말 기대된다. 다소 가라앉은 바둑계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훌륭한 돌파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바둑이 시범종목이 되었고, 조만간 정식종목이 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많은 학교에서 바둑 팀을 만들 것인지. 정부나 지자체 교육청에서 바둑 팀 창설에 상당한 인센티브를 준다면 또 모를까, 바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없는 학교가 바둑 팀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전국체전 바둑종목 여자 일반부 경기 장면.
“대학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다. 입학한다고 치자. 졸업하면? 프로기사가 되나? 특기생으로 들어가 졸업하면 프로기사 면장을 준다고 치자. 승부세계에서 연구생 입단자들과 경쟁이 될까? 그저 대학 졸업장만이 목표라면 모를까. 바둑 특기생으로 입학하고 졸업해서 바둑 쪽의 일자리를 찾으려는 것이라면 명지대 바둑학과, 세한대(구 대불대) 바둑전공 과정이 있지 않은가. 그쪽도 졸업생들이 일자리 찾기가 간단치 않은데. 재작년에 전남 순천에 생긴 ‘바둑고등학교’도 있다. 바둑 특기생으로 들어가 다른 전공을 택하는 것도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어색한 일이다.”
“작년에 국회에서 바둑진흥법을 발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무산되었다. 바둑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바둑계가 날개를 달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반대로 바둑이 청소년 교육과 건전한 여가문화 진작에 기여한다든가, 그런 걸 먼저 보여줌으로써 진흥법 같은 것이 생기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방적으로 특혜를 받는 것은 어렵게 된 시대니까.”
“야구나 축구 같은 인기 종목은 대개는 졸업 후 진로가 보장되어 있다. 특기생 자체가 우수한 선수다. 바둑은 대학 입학 연령대의 연구생들이 우수한 선수다. 그런데 야구 특기생들은 졸업 후 곧바로 구단에 스카우트되어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지만 바둑 특기생들은 어차피 입단대회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선수 생활을 할 수가 없다. 대학과 입단-프로생활은 양립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보아 온 사례들이 있지 않은가. 또 바둑은, 엘리트 체육이라는 것이 듣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다른 종목들과는 다르다. 바둑의 엘리트 체육은 곧 프로기사다. 그래서 바둑은 생활체육으로의 길을 열심히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내에도 아직 바둑이 보급이 안 되어 있는 지역이 많다. 대도시가 아니라 군 단위, 읍 단위에는 기원이나 바둑교실 같은 게 하나도 없는 곳이 많다. 해외보급, 세계화도 중요하지만, 보급에 뜻이 있는 프로기사들, 아마 고수들, 연구생 출신들, 명지대 세한대 졸업생들, 이들을 ‘바둑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바둑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는 군이나 읍에 파견하는 연구를 해야 한다. 각 지역이 그래도 엇비슷하게 바둑이 보급되어야 지역마다 선수도 생기고 학교에 바둑 팀도 만들어지고 전국체전도 활성화될 것 아닌가.”
바둑이 체육으로 이사를 간 것도 어느덧 15년이다. 짧은 세월은 아니나 정체성을 재정립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바둑계의 형편이 예전만 못하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게 성급한 기대를 엄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넓혀 이웃 종목들과 연대하고 싶다. 바둑의 본질을 잃지 않고 체육 쪽에서도 입지를 굳히는 길일 수 있다. 새로운 기운을 충전하면서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자리를 잡은 후에 자체에서 다시 경쟁하면 되지 않을까. 바둑이 설마 체스, 브리지에 밀리기야 하겠는가.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