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법원에서 한 의원의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받고도 민주당 차원의 거센 반발로 영장 집행을 하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연합해 ‘표적 수사’라며 정치 공세까지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 1일 한 의원에 대한 영장 집행이 무산되자 “헌정사상 국회의원이 법원에서 발부한 구속영장 집행을 거부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한 의원한테 뒤통수를 맞았다”며 분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찰은 지난달 29일 SK그룹과 부동산개발업체 하이테크하우징으로부터 10억5천만원의 불법 자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난 한 의원을 소환 조사한 뒤 “검찰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법원 영장실질심사에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한 의원의 약조를 믿고 귀가 조처했기 때문이다.
한 의원은 당초 검찰 조사를 마친 뒤에는 “이미 혐의를 대부분 인정한 마당에 구차하게 다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싫다”며 검찰에 실질심사 포기 의사를 밝히기까지 했으나, 나중에 변호사와 상의한 뒤 “심사를 받겠다”고 말을 뒤집었다고 한다.
이어 한 의원측은 우선 “변론 준비가 덜 됐다”며 30일 오후 2시로 예정된 실질심사를 하루 연기해줄 것을 법원에 요청했고, 법원은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한 의원은 법원이 하루 늦춰 31일 오전 11시 열기로 한 영장실질심사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대신 한 의원은 민주당사 안에 은신한 채 “얼마 전 노무현 정부의 현직 장관 한 명이 집으로 찾아와 ‘열린우리당 입당’을 권유해 거부했는데 그 이후 나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됐다”며 ‘표적 수사’ 주장을 제기했다.
연말연시 언론사 등의 정당 지지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날개 없는 추락’을 거듭해온 민주당은 한 의원의 구속 위기를 ‘민주당 살리기’ 기회로 삼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민주당은 우선 “한 의원과 함께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경선에 나갔던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대표의 경선자금에 대해서도 수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한 의원을 출두시키지 않겠다”며 대검찰청에 노 대통령과 정 대표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하는 등 ‘맞불 작전’에 들어갔다. 대검은 2일 이 사건을 중수부 1과에 정식 배당했다.
또 당시 강운태 사무총장 등은 송광수 검찰총장을 항의 방문해 ‘편파 수사’를 따지기도 했다. 그 사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31일 한 의원이 출석하지 않은 가운데 영장실질심사를 한 뒤 한 의원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 사유는 “검찰의 범죄 소명이 충분하고, 도주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법원은 검찰이 영장에 적시한 한 의원의 두 가지 범죄사실 가운데 SK그룹 돈 4억원 수수 혐의만 인정하고, 하이테크하우징 자금 6억5천만원 수수 부분은 기각했다.
이에 대해 최완주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검찰은 한 의원이 김원길 한나라당 의원을 통해 하이테크하우징 박문수 회장으로부터 6억원을 받고 자금 지원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설명했으나, 한 의원이 이를 부인하는 데다 검찰의 소명이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검찰 주변에서는 “한 의원이 실질심사에 출석했다면 ‘도주 우려’가 빠지고, 혐의도 가벼워져 영장이 기각됐을 확률이 더 높다”고 분석했다.
▲ 지난 1일 민주당 당직자들과 지지자들이 한화갑 의원 구속영장 집행을 위해 여의도 민주당사를 찾은 검찰수사관들을 저지하고 있다. 사정칼날을 휘두르며 숱한 국회의원들을 떨게 했던 검찰이 ‘한화갑덫’에 걸린 형국이다. | ||
검찰은 우선 서울지검 기원섭 수사2과장을 필두로 한 ‘영장 집행조’ 20여 명을 여의도 민주당사로 급파해 영장 집행을 시도했다. 이미 전날 저녁부터 당사 정문 입구를 봉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당직자와 한 의원 지지자 등 2백여 명은 수사관들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검찰은 오후 들어 수사관을 50여 명으로 증원해 재차 당사 진입을 시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저녁 6시께 경찰 1백50명을 대기시켜 놓고 당사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기도 했으나, 실제 진입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
어느새 민주당 지지 네티즌까지 몰려들면서 당사 내부에 4백여 명, 당사 입구와 주변 도로에 7백여 명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칫 물리적 충돌이 벌어질 경우 인명사고 위험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지리한 양측의 공방 끝에 결국 검찰은 영장 유효 만료 1시간을 앞둔 밤 11시 영장 집행을 포기하고 수사관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2일 0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와 함께 임시국회 회기가 시작됐고, 한 의원의 불체포 특권도 살아났다.
한 의원은 이렇게 당장의 ‘화’를 면했지만 검찰의 강경한 태도로 미뤄볼 때 이변이 없는 한 구속영장이 재청구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당장 “영장 재청구는 당연한 것이고, 시기 조율만 남았다”고 밝혔다.
물론 한 의원의 혐의에 대한 보강 수사도 강도 높게 진행될 전망이다.
현재 한 의원은 2002년 2월 서울 롯데호텔 일식집에서 손길승 SK그룹 회장을 만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자금 조로 8억원을 요구한 뒤 세 차례에 걸쳐 처남 정아무개씨를 시켜 서울 종로5가 지하 공영주차장에서 김창근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으로부터 현금 4억원을 받은 혐의가 있다. 또 같은해 당 대표최고위원 경선 당시 하이테크하우징 박 회장으로부터 6억5천만원을 수수했는데 이 중 5천만원은 10만원 수표 5백장으로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그러나 한 의원은 김원길 의원을 통해 받은 6억원에 대해 “경선 3일 뒤 사후 보고받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검찰 관계자는 “당시 박 회장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패한 뒤 제주도에 내려가 있던 한 의원을 찾아가 대표 최고위원 출마를 권유하고, 한 의원이 ‘내가 무슨 돈이 있느냐’며 주저하자 자금 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당시 박 회장이 한 의원과 제주도에서 사흘간 식사 등을 하며 사용한 신용카드 내역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또 나머지 5천만원은 한 의원이 직접 받았다는 박 회장 진술에 따라 사용처를 가리기 위해 수표 추적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검찰은 “한 의원 혐의를 뒷받침할 미공개 ‘히든 카드’가 있으며, 결국 한 의원은 자신의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검찰이 보유한 ‘히든 카드’가 한 의원이 경선 자금으로 받은 돈 일부를 개인적으로 유용한 단서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이 나오고 있으나, 검찰은 “나중에 보라”며 함구하고 있다.
한편 민주당은 한 의원 수사와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으나, 검찰은 “터무니없는 음해”라며 강력히 반발해 진상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민주당의 주장은 “대검 중수부가 지난해 10월 SK그룹 비자금 수사과정에서 한 의원 등 정치인 2~3명의 자금 수수 사실을 파악하고도 지금껏 미루다 총선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수사를 한 경위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은 ▲본류인 대선자금 수사 때문에 한 의원의 경선자금 수사가 우선 순위에서 밀렸는데 ▲마침 최근 서울지검 특수2부가 대우건설 및 하이테크하우징 비자금 수사를 하다 한 의원의 다른 혐의가 나와 한꺼번에 수사를 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어쨌든 검찰의 한 의원 수사는 야당의 총선 전략과 맞물려 ‘불법 대선자금 비리 의혹’ 청문회 개최를 앞당기는 등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낳고 있다. 특히 검찰 내부에서는 한동안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거침없이 진행되던 검찰의 불법 정치자금 수사가 ‘역풍’을 맞는 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론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의원에 대한 전격 소환방침이 정해진 지난달 28일 밤 대검의 한 간부는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어서 검찰로서도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결국 이 같은 염려는 기우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