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기념비는 촛불과 비둘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가로 95cm, 세로 55cm, 높이 195cm.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범대위)측이 주도해 지난해 세운 것이다.
사실 여중생 추모 기념비의 ‘수모’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6월13일 범대위측이 최초 기념비를 제작해 현재 위치에 설치했지만 한 달여 만에 신원 미상의 청년 서너 명에 의해 세 동강 나고 말았다. 이번에 철거된 기념비는 최초 기념비의 두 배 크기로 다시 제작된 것이다.
촛불기념비를 디자인한 사람은 문예단체 ‘천명’에서 활동하는 화가 김성수씨(35), 제작은 경기도 건설산업노조 부위원장 박한흥씨(46)가 맡았다. 한 달여 가까이 공을 들인 기념비가 철거된 데 대해 제작자 박씨는 “착잡한 심정이다. 어서 빨리 추모비가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고 말했다.
언론에 1천만원이 든 것으로 보도된 것과는 달리 기념비 제작에는 2백여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디자인, 제작 모두 자원봉사로 이뤄져 재료비만 들어간 것.
철거된 기념비는 현재 종로구 청운동 불법설치물 보관창고에 보관돼 있다. 종로구청 건설관리과 김옥동 주임은 “지난해 6월13일 설치 이후 6번에 걸쳐 철거요구를 했음에도 범대위에서 아무런 답이 없었고, 12월 말까지 시한을 정해줬지만 이행치 않아 부득이 철거를 강행했다”고 밝혔다.
기념비를 설치했던 범대위측은 종로구청의 철거 요구가 거듭되자 지난해 말 기념비를 동판의 형태로 만들어 미국대사관 옆 공원이나 교보빌딩 옆에 두는 방안 등을 구청측에 제안한 바 있다. 청계천에 설치된 전태일 기념 동판처럼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청측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종로구청 관계자는 “그러한 제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원 등 시 관련 시설에 구조물을 설치하는 문제는 시청 관할 사항이지 구청에서 뭐라고 말할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현재 종로구청측은 5만원의 과태료를 내고 ‘다시는 이런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자인서를 쓰면 기념비를 돌려준다는 입장. 그러나 범대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계획이다. 범대위 관계자는 “1월15일까지 기념비가 원상복구되지 않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적절한 조치’로는 철거된 기념비의 2배 크기로 기념비를 다시 제작, 같은 위치에 설치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범대위 방침에 대해 종로구청측은 “만약 그럴 경우 다시 철거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
과연 두 배로 커진 기념비가 같은 자리에 다시 세워질지, 그리고 그 새 기념비가 또 철거될지는 미지수. 시민들은 그저 기념비의 ‘얄궂은 운명’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