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죽음은 두렵지 않다”
‘웰다잉’을 위해서는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용인 평온의숲’의 봉안당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우리나라 ‘죽음의 질’은 세계적으로도 낮은 수준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010년 산하 연구기관을 통해 영국, 호주, 뉴질랜드, 한국 등 40개국을 대상으로 ‘죽음의 질’을 조사했다. 그중 한국은 32위에 그쳤는데 △안락사 허용 등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수준 △임종환자 처치 관련 의료진 숙련도 △임종 전 진통제 투여 편의성 △환자와 의료진과의 관계 등을 기준으로 한 결과였다.
‘행복한 죽음 웰다잉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강원남 웰다잉 플래너도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성숙한 죽음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4층을 표기하지 않는 것만 해도 죽음을 막연히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다. 웰다잉에 대한 강의를 나가도 죽음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들이 꽤 많다. ‘재수 없는 소리 하고 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무턱대고 화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웰다잉은 멀기만 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일종의 ‘죽음 연구가’인 웰다잉 플래너에게 들어본 ‘잘 죽는 법’은 사뭇 철학적이었다. 죽음은 ‘육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종결에는 ‘정신’의 완결함이 숨어 있었다. 강원남 웰다잉 플래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많은 죽음을 목격했는데 편히 떠나시는 분이 있는 반면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며 “삶에 대해 후회나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잘 살아오신 분들은 죽음 앞에서도 담담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미움과 증오를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셨다. 이들을 보면서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준비하는 일도 중요하다. 강원남 플래너는 “죽음은 명확히 일어나는 일인데 준비를 안 하려는 게 이상하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아야 그에 맞춰 준비도 할 수 있다. 죽음은 언제,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노인만 죽음을 생각할 게 아니다. 일본, 대만, 미국 등에서는 죽음에 대한 교육을 어릴 때부터 시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런 게 없다. 입관체험 등은 이벤트성으로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심만 조장할 수도 있다. 이처럼 죽음을 잘 모르니 자살도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OECD 국가 중 한국 9년 연속 1위:10만명당 34명). 지금 당장 올바른 죽음을 준비해야 웰다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웰다잉을 바라면서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웰다잉 지도자나 교육기관이 턱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관련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일상 속에서 웰다잉을 준비할 수 있다. 강원남 플래너는 “누누이 강조하지만 현재를 잘 살아야 웰다잉도 가능하다. 또한 스스로 생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나머지 부분은 어떤 절차를 거칠 것인지 결정만 내리면 된다. 사소한 일부터 하나씩 해나가면 얼마든지 웰다잉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면 이제 행동이 필요하다. 우선 어떤 죽음을 원하는지 상세히 적어보자. 국내 사망자 대부분은 죽음 직전까지 의료진의 곁에서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나지만 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생전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계획해두지 않아 원치 않는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사전의료의향서’ 한 장만 작성해도 평소 바라던 웰다잉에 충분한 도움이 된다. 사전의료의향서는 뇌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호흡과 체온유지 등 기본적 신체 기능유지가 불가능할 때 등 특정한 상황에 놓일 경우 어떤 의학적 처치를 받거나 거부할지를 미리 밝혀두는 것으로 개인이 직접 작성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등을 통해 작성 및 보관할 수 있다. 보통 사전의료의향서라 함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내용만 쓸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0.1%의 소생 가능성이 있다면 끝까지 연명치료를 받겠다” “육체적인 통증을 줄일 수 있는 치료는 모두 받겠다” 등 자신이 원하는 의견이라면 어떤 것이든 자유로운 형식으로 기록할 수 있다. 특히 심폐소생술 중단, 인공호흡기 부착 거부, 통증약제요청, 강심제 등의 약제 투여 거부 등 의료적인 자문을 받아 보다 상세하게 기록하면 의료진의 빠른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다만 현재까지 사전의료의향서의 효력은 법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라 가족과 의료진 사이에 분쟁의 소지가 남아있는 상태다.
다음은 유언장 및 웰다잉 부고장 작성이다. 유언장 작성은 이제 보편적인 일이 됐지만 웰다잉 부고장에 대해선 생소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보통 가족들만 볼 수 있는 유언장과 달리 부고장은 자신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미리 어떤 사람들에게 부고를 알릴 것인지 직접 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인간관계를 되돌아볼 수도 있으며 “행복하게 떠나니 걱정 말라”는 당부와 남은 자들에게 위로의 말도 남길 수 있다. 또한 부고장을 통해 생전 자신이 원하는 장례식이 어떤 것인지 알릴 수도 있다. 최근에는 생전에 부고장을 미리 접수받은 뒤 사후에 대리 발송해주는 업체들도 생겨나고 있어 이를 활용해도 된다. 상조업체의 부가 서비스로 이용이 가능하고, 포털 사이트에 ‘모바일 부고장’이라고 검색하면 몇 개 업체가 나온다.
이제 마지막 장례 절차에 대한 결정이 남아있다. 미리 수의, 영정사진, 관 등 물질적인 준비에서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장례 분위기, 절차, 방문객 접대, 유골 처리법 등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게 더 중요하다. 강원남 플래너는 결혼식 같은 장례식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밝은 분위기에서 살아생전 사진을 전시하고 미리 준비해둔 영상편지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게 할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밥 한 끼 대접한다는 의미에서 뷔페를 차려두고 싶다. 이 모든 과정을 결혼식처럼 짧게 2시간만 진행하고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이 모든 준비과정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을 절대 혼자 결정해서는 안 된다. 강원남 플래너는 “반드시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 혼자만 준비해두고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어떤 준비를 했는지 모를뿐더러 법적으로도 효력을 가지기 위해선 생전 의사표시를 확실해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이제 그 죽음을 ‘누구나’가 아닌 ‘나만의’ 것으로 만들 때도 되었다. 옛날처럼 굶지는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웰다잉플래너가 기억하는 ‘웰다잉’ “약물 치료 거부하고 성경으로 고통 이겨” “다음 달쯤이면 무지개다리를 건널까.” 간암 말기로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70대 김 아무개 할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로 했다. 햇살이 따스하던 오후 김 할머니는 점심식사를 마친 후 산책을 하면서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상상했다. 막연히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 생각하니 가능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를 마친 김 할머니는 “깨끗하게 떠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김 할머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서도 약물을 이용한 통증 치료를 거부했다. 대신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통을 이겨내려 애썼다. 한 번씩 앉아있기도 버거울 만큼 극심한 통증이 찾아오면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성경책을 폈다. 온 정신을 집중해 성경책을 읽다보면 잠시나마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 그것도 힘들면 가족들의 손을 말없이 꼭 붙잡고 고통을 이겨나갔다. 그렇게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해가던 김 할머니는 마지막을 직감한 듯 자녀들과 인사를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은 김 할머니. “사람이 이렇게 깨끗하고 예쁘게 돌아가실 수 있구나.” 김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모두가 한 목소리를 냈다. 그동안 김 할머니와 함께 죽음을 준비했던 자녀들도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어머니를 편히 보내드릴 수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타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가슴에 담지 않았기에 이처럼 예쁘고 편히 돌아가실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뿐만 아니라 남겨지는 사람들에게도 행복한 죽음을 보여주셨다.” [박] |
웰다잉 10계명 ‘죽음은 자연과 하나 되는 것’ 2008년부터 지금까지 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의사로 일하고 있는 김여환 완화의료센터장은 매일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죽음에 담대해질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불편하더라도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순간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이 순간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죽음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펴낸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에 수록된 웰다잉 10계명을 소개한다. 일요신문 DB “우리는 바로 이 순간 행복해야 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을 포기하지 마세요. 순간의 행복을 위해서 흥청망청 즐기라는 말도, 금방 사그라질 쾌락에 스스로를 내던지라는 말도 아니랍니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2. 건강할 때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세요 “건강할 때 단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세요. 죽어가는 노인은 사라질 도서관과 같습니다. 그들을 도우면 그들의 작은 목소리로 삶의 비밀을 속삭여줄 것입니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세요. 죽음이 우리에게 삶을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3. 나쁜 소식도 정확히 알아야 해요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진행됐는지, 치료 목표는 무엇인지,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급하고 거칠고 불같은 성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보호자들은 환자의 평소 성격이 병세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사실을 숨깁니다. 성격은 인생의 과정뿐 아니라 마지막도 결정합니다.” 4. 마지막에 할 말을 지금 하세요 “임종 순간 ‘사랑합니다,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남은 이들은 당신을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할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마지막까지 아껴두지 말고 지금 하면 어떨까요. 이 세 마디 말이면 삶의 모든 갈등이 사라진답니다.” 5. 죽음이 불행인 것처럼 대하지 마세요 “죽음은 가장 슬픈 일이지만 그것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는 마세요. 슬픔으로 눈이 멀지 않으면 내 슬픔을 통해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볼 수 있는 포용력이 생깁니다. 슬픔이 찾아왔다고 해서 인생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이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자연과 하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일은 어려운 경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6. 통증조절을 잘하는 주치의를 알아두세요 “병도 고통도 없는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좋겠지만 누구나 그렇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찾아갈 수 있는 의사를 알아두세요. 육체적 통증과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는 의사를 친구로 만드는 것은 인생의 보험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7. 건강할 때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보세요 8. 마지막 순간까지도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만드세요 “죽어갈 때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세요. 영화를 보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절대자에게 기도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의미가 있습니다.” 9. 당신은 가도 당신의 재산은 남습니다 “한 환자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준 뒤 딸은 병원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자주 들러 아버지를 봐주던 딸이었는데 병원에 오지 않는 오빠에 비해 자신의 몫이 초라하니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남은 사람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 유언을 남기세요. 죽는 것도 힘들고 억울한데 떠나는 사람이 남는 사람을 배려하는 일까지 해야 되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인생의 선배가 아니라 먼저 떠나는 사람이 인생의 선배입니다. 후배를 배려하는 여유를 가질 줄 아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잘 쌓아 올리는 방법입니다.” 10. 마지막을 같이하는 웰다잉 보호자를 만드세요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마지막이 외롭지 않은 건 아닙니다. 헛된 만남보다는 단 한 사람의 진심과 만나야 죽음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웰빙, 웰다잉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떠날 때 손을 잡아줄 사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