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19일 전경련 회장단이 청와대 오찬에 앞서 대기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날 저녁 출국한 이건희 회장(맨 앞)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 보인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대검 중수부(부장 안대희 검사장)는 이번 주부터 불법 대선자금 수수 등에 직접 연루된 혐의가 포착된 재벌기업 총수와 임원들을 잇따라 소환조사 및 사법처리할 계획이다.
안대희 중수부장은 “기업 총수를 포함해 혐의가 무거운 기업인들에 대한 구속수사에 들어가며, 죄질에 상응한 처분을 할 것”이라며 “구속 대상자는 복수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안 부장은 특히 “대선자금 제공을 위해 비자금을 조성한 기업인을 우선적으로 소환하고, 자수·자복 여부도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하는 데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 부장의 말은 재벌 총수일지라도 ▲분식회계 및 공금 횡령 등을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거나 ▲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은 경우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안 중수부장은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과의 인터뷰에서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기업인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된 데 대해 “죄질 및 자수, 자복에 따른 사법처리 기준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안 대희 중수부장은 이날 오전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밝히고 “대통령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검찰)도 우리 입장이 있기 때문에 법무부를 통해서 설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사회에서 기업인들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고려할 사항이 있다”고 덧붙였다.
수사팀은 일단 이번 주에 5대 그룹의 구조조정본부장급 임원 일부를 포함해 5~6명 정도의 기업인을 소환조사한 뒤 혐의가 중할 경우 곧바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총수급 기업인들은 이르면 이번 주말이나 다음주 초부터 소환될 전망이다.
검찰은 1차로 한나라당에 3백72억원을 제공한 삼성그룹의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사장을 17일 피내사자 신분으로 소환조사한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미 구속, 불구속 대상 기업인들에 대한 분류 및 선별작업을 거의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안 부장은 지난 주말 기자들에게 재벌 총수 사법처리 방침을 설명하면서 “미국에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경우 조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는 대표적인 자수·자복의 케이스”라고 선처 의사를 밝혀,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또 “한화그룹은 수사에 협조했고, LG그룹은 자금의 출처가 검증됐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검찰 안팎에서는 최소한 한화그룹과 LG그룹의 경우 총수가 구속되는 사태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중 한화그룹은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김승연 회장이 직접 당시 서청원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장에게 국민주택채권 10억원을 전달하는 등 모두 50억원을, 노무현 후보캠프측에는 이재정 현 열린우리당 의원을 통해 10억원을 각각 제공한 사실이 드러난 상태다. 서 의원의 경우 이 채권을 당 선거캠프에 주지 않고 사위에게 넘겨 개인 사업자금으로 쓰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한화그룹으로부터 채권번호 등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받았고, 이는 서 의원과 이 의원을 구속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월2일 스탠퍼드대학 연수를 내세워 미국으로 건너간 김승연 회장은 현지에서 팩스로 “서 의원에게 직접 10억원을 줬다”는 진술서를 검찰에 보내기도 했다.
▲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롯데는 이번 대선자금 수사에 비협조로 일관해 검찰에 ‘미운털’이 박힌 것으로 알려졌다. | ||
LG그룹의 경우, ‘차떼기’ 방식으로 서정우 변호사를 통해 1백50억원을 한나라당에 제공한 사실이 드러나 엄청난 파문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화그룹과 마찬가지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선처 대상’ 기업으로 분류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문제의 1백50억원이 대주주 갹출금이라는 회사 소명이 검찰 조사에서 대부분 사실로 확인된 것도 선처 방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한화와 LG그룹을 제외하고 삼성그룹 등 나머지 주요 재벌기업 중에서 어느 곳이 ‘오너급 구속’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인가?
일단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만 따지면 수사 비협조 등으로 검찰에 ‘미운 털’이 박힌 기업으로는 롯데그룹이 1순위로 꼽힌다.
검찰은 그동안 롯데의 구조조정본부장격인 신동인 롯데쇼핑 사장이 신경식 한나라당 의원에게 비자금으로 조성한 10억원을 준 사실을 확인했으나, 이는 ‘빙산의 일각’ 정도로 보고 있다. 롯데그룹의 기업 규모 등을 감안할 때 별도의 뭉칫돈을 여야에 대선자금으로 제공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롯데측은 검찰이 수차례 롯데건설과 구조본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는 등 강도 높은 압박 조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고, 일본에 머물고 있는 신격호 회장과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은 아예 한국에 들어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임승남 롯데건설 사장과 김병일 롯데그룹 경영관리본부사장 등이 ‘괘씸죄’에 걸린 오너 대신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점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차그룹도 위험하다. 한나라당에 1백억원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된 현대차그룹은 “1백억원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남긴 돈의 일부”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나, 검찰은 이를 믿기 어렵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결국 현대차그룹 경영진에 대한 사법처리 수위는 1백억원의 출처가 어떻게 결론나느냐에 따라 좌우될 전망이다.
회계부정을 통해 조성한 불법 자금을 정치권에 제공한 단서가 확보된 SK, 금호, 대우건설, 태광실업 등도 총수나 최고 경영진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가장 ‘뜨거운 감자’는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의 처리 문제다.
삼성은 한나라당에 1백52억원을 건넨 사실이 1차로 드러난 데 이어 최근 채권 1백70억원과 현금 50억원 등 2백20억원을 한나라당에 제공한 단서가 추가로 검찰에 포착됐다. 모두 3백72억원에 달하는 삼성의 불법 자금은 현재까지 검찰이 밝혀낸 재벌기업 비자금 중 최대 액수다.
▲ 지난 14일 노무현 대통령은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오른쪽)과의 특별대담에서 “불법 대선자금 연루 기업인들에 대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뿐만이 아니다. 핵심 조사 대상자인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은 출장을 이유로 장기간 해외에 체류중이고, 김인주 사장 역시 지방 출장을 이유로 검찰 출석을 미뤄왔다.
현재 검찰은 이 돈이 분식회계 등을 통해 조성된 비자금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중이다. 또한 이 정도 돈을 움직이려면 김인주 사장이나 이학수 부회장의 ‘윗선’, 곧 이건희 회장의 지시 또는 묵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남은 검찰 수사의 최대 관심사는 이 회장의 소환조사 내지 사법처리 여부에 쏠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15일 “삼성그룹이 불법 정치자금과 비자금의 창고였음이 밝혀지고 있다”며 “검찰은 당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처벌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추 의원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 간담회를 갖고 “삼성은 현재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한나라당에만 3백72억원의 불법 자금을 제공했다”며 “이 회장은 그동안 윤리 경영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이는 더 충격적”이라고 강조했다.
추 의원은 이어 “이건희 회장의 비자금 조성은 명백히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죄에 의해 처벌되어야 할 사안”이라며 “일반 국민은 수백만원만 횡령해도 구속되고, 처벌되는 것이 현실인데 검찰이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삼성측은 “문제의 자금은 대주주의 돈이며, 횡령한 것은 아니다”며 “추 의원의 발언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검찰 안팎에선 일단 이건희 회장 수사가 경제에 미칠 파장 등을 감안할 때 수사팀이 김인주 사장이나 이학수 부회장을 사법처리하는 선에서 삼성그룹 수사를 매듭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안 부장도 16일 삼성그룹에 대해 “채권 1백12억원을 건넨 사실을 먼저 말했기 때문에 자수, 자복한 쪽”이라고 밝혀, 선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그러나 삼성이 한나라당에 제공한 채권 번호를 검찰에 제출하지 않고 대주주 개인 돈이라고 해명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더 조사해야 한다”고 여운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이 불법 정치자금 제공을 직접 지시했거나 삼성 비자금이 분식회계 등으로 불법 조성된 것으로 드러날 경우 이 회장이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의 한 소식통은 “17일 소환되는 김인주 사장이 어느 정도 수사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느냐에 따라 이건희 회장의 처리 방향이 달라질 공산이 크다”며 “이 경우 수사팀은 노무현 후보 선거캠프에 제공한 대선자금에 대한 정보 제공을 조건으로 삼성측과 ‘딜’을 할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연일 한나라당으로부터 “4대 그룹이 정치권에 준 자금은 왜 한나라당 것만 나오고 노 캠프 것은 한푼도 나오지 않느냐”는 타박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검찰로서는 대선자금 수사를 매듭짓기에 앞서 무엇보다 노 캠프에 유입된 재벌기업 자금을 1원이라도 더 밝혀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측이 맞다면 삼성 이외에 다른 그룹 총수들의 사법처리 향배도 노 캠프 자금에 대한 수사 협조 여하에 따라 일정 부분 영향을 받을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