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사진은 지난 98년 헌재 공개변론 모습. | ||
탄핵 정국의 소용돌이에서 지금 국민의 이목은 헌법재판소(헌재)에 쏠려 있다.
헌재의 결정에 따라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둘러싸고 다시 한 번 정국이 요동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일요신문>에서는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전격 가결된 이후 전직 헌재 재판관을 지낸 19인을 상대로 탄핵에 대한 헌재 판결 전망, 그리고 헌재 결정시기 등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전화 인터뷰에 응한 전직 재판관들은 한결같이 “현재 상황에서의 입장 표명은 어떤 식으로든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며 조심스런 입장을 표명했다.
현재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헌재의 결정 시기에 대한 질문에 전직 재판관 6명이 한결같이 “최초로 벌어진 국가적 중대사인 만큼 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될 것으로 보며, 헌재의 최종 결정 시기는 4·15총선 이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을 나타냈다. 나머지는 입장 표명을 회피했다.
이번 국회 탄핵에 대해 헌재에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전직 재판관들은 “지금 그런 사안에 대한 개인 의견 표명은 적절치 않다”는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김양균 전 재판관은 “현재 탄핵 문제가 헌재로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전직 재판관들이 어떤 식으로든 얘기하는 것은 현직 재판관들이 심리하는 데 부담을 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조승형 전 재판관 등 대부분의 전직 재판관들은 “국회가 의결한 탄핵 사유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봐야 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하지만 입장 표명 불가를 전제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개인적 견해를 밝힌 이들이 많았다.
한병채 전 재판관은 “탄핵 사유가 명확한가에 따른 대답을 지금 여기서 확실히 하기엔 조심스럽지만, 국회 3분의 2 이상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탄핵한 내용을 헌재가 그냥 무시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그는 “국회가 내놓은 몇 가지의 탄핵사유는 다만 예시적 차원일 뿐인 만큼, 그것만 갖고 사유가 미흡하다 어쩌다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헌재는 보다 포괄적 범위에서 대통령의 위법성 여부를 따지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경철 전 재판관은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한 쟁점인 만큼 헌재는 의도적으로라도 철저하게 법리적 해석에만 집중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일각에서는 헌재의 보수적 성향을 말하기도 하는데, 재판관들은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 하는 성향의 문제가 필요치 않으며, 헌재는 법적인 판단을 최우선하게 된다”고 밝혔다.
전직 재판관으로서가 아닌 법조계 한 개인의 사견임을 전제로 한 인사는 “헌정 사상 최초의 사례로 남게될 이번 대통령 탄핵 결정이 향후 헌법 질서의 한 기준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국민적 공감대가 합의된 명확한 탄핵 사유가 아닌 다음에야 현재처럼 논란이 분분한 내용만으로 탄핵을 결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입장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이외에도 3명의 전직 재판관이 “국민과 법학자들의 부정적 견해, 엄청난 국정 혼란 초래 등을 이유로 탄핵 결정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개인 견해를 밝혔다.
이영모 전 재판관은 “여론은 헌재의 결정을 재촉하는 방향으로 모아지는 듯하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고 또 처음 있는 일이어서 중간중간에 논의가 계속되고 토론이 이어지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내가 알기로는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헌법 조문 자체도 다섯 개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며 “첫 사례를 남긴다는 차원에서도 절차를 밟아서 천천히 그리고 확실히 진행할 것”으로 전망했다.
황도연 전 재판관 또한 “사안이 중요한데 일부 여론에서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해서 거기에 떠밀리듯 빨리 처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하 전 재판관 역시 “양측의 주장에 따른 자료가 접수되고 또 그것을 검토하는 데만 걸리는 시간을 따져보더라도 4·15총선 이전에 결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헌재의 결정에 정치적 상황이 고려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영모 전 재판관은 “헌재의 결정이 총선 정국과 맞물리는 것은 사실이나, 헌재의 성격상 이를 고려하는 결정은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하 전 재판관 역시 “재판관들의 정치적 성향은 무의미하며 사안의 중요성과 책임성을 미뤄볼 때 철저하게 법적 요건만 따지게 될 것”으로 내다봤다.
대한변호사협회(변협)에서 제기한 ‘국회의 탄핵 발의 절차에 대한 위법성 여부’에 대해서도 입장은 다양했다.
한 전 재판관은 “현재 변협에서 국회의 탄핵 발의 자체에 대한 위법성 여부를 문제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며 “몇몇 간부급 인사들이 너무 섣부른 정치편향적 발언을 일삼는 것은 법조인의 처신으로 옳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하 전 재판관은 “변협이 지적한 내용 중 탄핵발의 의결의 절차상 문제는 없는 듯하고, 다만 무기명 비밀투표로 해야 하는 점을 지켰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남아 있다”며 “만약 사실상 반공개적 투표가 됐다면 이는 절차 위배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향후 정국의 전망에 대해서도 이성렬 전 재판관 등은 “일부에서 마치 헌법질서가 중단된 것처럼 우려하지만 그 정도의 큰 위기 상황은 아니며, 시간이 지나면 차분해질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반면 이시윤 전 재판관 등은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인 만큼 어느 정도의 정치적 혼란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전화 인터뷰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직 재판관들이 언론과의 접촉을 철저히 회피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조규광 전 헌재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미처 신경을 못 쓰고 있다”고 밝혔고, 김용준 전 헌재소장은 관계자를 통해서 “언론과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특히 김 전 소장을 비롯한 바로 직전의 재판관 9인 가운데 하 전 재판관 등을 제외한 6인이 노코멘트로 일관해 사전에 입장을 정리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한 관계자는 “탄핵 가결 이후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며 “전직 재판관들 역시 미처 예상치 못했던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적잖이 당황하고 있는 터라, 섣부른 대응보다는 아예 언급 자체를 자제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는 입장인 듯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