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개조’ 칼자루 쥐고 단숨에 잠룡으로…
지난 5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정홍원 국무총리의 뒤를 이을 후보자로 안대희 전 대법관을 내정한 것을 두고 여권에서 나오는 반응 중 한 가지다. 강태공은 바늘도 안 달린 낚시대를 위수(渭水)에 드리운 채 세월을 낚고 있다가 서백(西伯, 훗날의 주나라 문왕)에게 발탁돼 함께 천하를 도모했던 인물. 안 후보자를 이에 비유하는 데에는 그의 발탁이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깬 일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의 앞날에 어떤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전망도 함께 담겨 있다. 안 후보자가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의 낙마로 갑작스럽게 ‘대타’로 기용돼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채 퇴장하게 된 정홍원 총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라는 얘기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가 지난 5월 2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총리 지명 소감을 밝힌 뒤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나도 깜짝 놀랐다.”
안대희 전 대법관이 총리 후보자로 내정됐다는 사실이 발표된 직후 기자들에게 보인 첫 반응이다. 청와대의 사전검증에 동의해줬지만 박 대통령이 정말로 자신을 발탁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는 22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갑작스러운 총리 지명 통보에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안 후보자는 평소 사석에서도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해왔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잠재적인 대권주자로 묘사하기라도 할라치면 “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강하게 부인하곤 했다.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역할을 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개를 가로젓기 일쑤였다.
여기에는 자신이 박 대통령과 좋지 않게 끝났다는 판단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안 후보자는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아 박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지만, 한광옥 현 국민대통합위원장을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영입하는 문제를 놓고 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충돌했었다. 자신이 수사했던 부정부패 정치인과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안 후보자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온 박 대통령에게 “저와 한광옥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 후보자가 한동안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으면서 강력 반발하는 바람에 박 대통령은 결국 한 위원장에게 국민통합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지 못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자신에게 개혁 이미지를 보태줬던 안 후보자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정부 출범 당시 안 후보자의 중용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은 끝내 그에게 자리를 주지 않았다. 한 위원장을 대통령 직속 국민대통합위원장에 앉힌 것과 대비된다.
2012년 9월 5일 당시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이 새누리당 당사 회의실에서 열린 대통령선거대책기구 임명장 수여식에 참석한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박 대통령에게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아웃’이라는 얘기를 익히 들었을 안 후보자로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하지만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달리 안 후보자가 박 대통령에게 사실상 내쳐진 뒤에도 인내심을 갖고 미래를 준비해 온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22일 기자회견 장면을 보면서 안 후보자가 이미 준비된 정치인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회견의 내용도 의미심장했지만 발언 톤도 마치 대중 연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안 후보자는 이날 회견에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 개인적 삶을 모두 버리고 비정상적 관행의 제거와 부정부패 척결을 통해 공직사회를 혁신하고 국가와 사회의 기본을 바로세우겠다”고 밝혔다. 국민들 앞에 출사표를 던지는 후보자의 결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제게 총리를 맡긴 것은 수십 년 적폐를 일소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서 총리로서 활동 계획, 나아가 대한민국 개조 방향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패러다임은 물질과 탐욕이 아닌 공정과 법치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기성세대 잘못으로 젊은 세대가 피해를 입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헌법이 명한 대로 대통령을 충실히 보좌해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밝힌 대로 국가 개조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며 “대통령을 진정으로 보좌하기 위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해 국가가 바른 길, 정상적인 길을 가도록 소신을 갖고 대통령께 가감 없이 진언하도록 하겠다”고도 말했다. 명실상부한 ‘책임총리’의 역할을 다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안 후보자를 ‘준비된 정치인’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대선 후 사실상 정치권에서 퇴장한 뒤에도 안 후보자는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 왔다. 대선 후 소위 재야 변호사가 된 뒤에도 안 후보자는 법원과 검찰청이 몰려 있는 서울 서초동에는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대형 로펌으로 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도 서초동이 아닌 용산에 개설했다. 간판에도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정법연구소’라는 이름을 걸었다. 또 형사사건은 전혀 맡지 않고 조세 관련 소송을 대리하는 데 그쳤다. 이들 모두 전관예우 논란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을 만한 행보다.
돌이켜보면 인맥 관리도 철저하게 한 듯하다. 안 후보자는 사실상 정치권을 떠난 뒤에도 대선 당시 인연을 맺었던 정치부 기자들과는 지속적으로 만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22일 기자회견 당시 김동연 국무조정실장과 함께 안 후보자의 뒤를 따랐던 김주식 씨가 사실상 안 후보자의 대언론 창구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김 씨는 새누리당 부대변인 출신으로 대선 당시에는 안 후보자의 특보로 일했었다.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를 오랫동안 담당한 인연으로 안 후보자와의 만남에도 참석하곤 했다는 한 기자는 “정치에 뜻이 없다면 왜 정치판을 떠난 사람이 특보를 따로 두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만났겠느냐”며 안 후보자의 등판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 기자는 “사석에서 만났을 때에도 안 후보자는 ‘정치에 뜻이 없다’고 말하곤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 후보자가 총리나 감사원장 같은 임명직뿐 아니라 서울시장 같은 선출직에도 뜻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며 “6·4 지방선거를 겨냥해 여권 핵심부에서 실질적인 제의를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라고 덧붙였다.
여권 내에서는 안 후보자가 박 대통령의 총리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내각 제청권 등 실질적인 권한을 보장받았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안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정식 임명되면 곧바로 전 내각에 사표 제출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며 “대통령과 상의해 살릴 사람은 살리겠지만 새 내각을 꾸리는 데 안 후보자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크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박근혜 정부가 처한 객관적 상황, 시대적 요구 역시 안 후보자가 ‘힘 있는 책임총리’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정부가 무능력과 무책임을 밑바닥까지 보여준 이상 박 대통령 역시 시대적인 개혁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박 대통령이 ‘한 번 찍히면 아웃’이라는 자신의 오랜 인사원칙을 깨고 안 후보자를 발탁한 것부터 이런 요구에 응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실제로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안 후보자 발탁 이유에 대해 “안 후보자는 대법관과 서울고검장, 대검 중수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불법 대선자금과 대통령 측근비리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소신을 보여줬다”며 “앞으로 공직사회와 정부 조직을 개혁하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강력히 추진해 국가 개조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분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를 근거로 “안 후보자야말로 관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평론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일종의 ‘프리핸드’를 부여받고 불법 대선자금과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총지휘했던 안 후보자가 이번에는 박 대통령의 지원 속에 공직사회 개혁이라는 칼자루를 쥐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점 때문에 여권 내에서는 안 후보자의 등판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대통령을 보좌해야 하는 총리가 너무 큰 꿈을 품은 것 아니냐는 우려다. 한마디로 안 후보자가 ‘제2의 이회창’이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영삼(YS) 정부 당시 감사원장으로 발탁됐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YS와 정면충돌하면서 일약 대권주자로 올라섰던 전례가 이번에도 재연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의원은 “큰 틀에서 보면 총리도 어디까지나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인데, 안 후보자가 자신의 대쪽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둘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대선 때 충돌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안 후보자가 원칙주의자인 동시에 다혈질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는 점도 이런 우려를 키우는 요인이다.
박 대통령이 절대로 책임총리제를 받아들일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박 대통령과 안 후보자의 충돌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새누리당의 또 다른 의원은 “2인자를 두지 않는 박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안대희든 누구든 박근혜 정부에서 책임총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런 대통령의 리더십을 고려하지 않고 안 후보자가 월권을 행사하려 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우려와 상관없이 박 대통령이나 안 후보자나 모두 국민들 앞에 성과를 내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운명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참사의 충격을 딛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 위해서, 안 후보자는 총리를 넘어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 공직사회 혁신과 국가 안전 시스템 개조를 이뤄내야 하는 셈이다. 공동운명의 두 사람이 전략적 제휴를 통해 ‘윈-윈’할 수 있을지, 20년 전의 사례처럼 파국으로 치달을지 관심이 쏠린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