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장 교체’ 택일만 남았다
안대희 총리 후보자의 사퇴를 두고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까지 김기춘 비서실장의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 비서실장. 사진제공=청와대
“안대희 전 국무총리 내정자는 오늘 언론 발표 직전에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더 이상 정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고, 비서실장을 통해 이 내용을 들은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았다고 비서실장이 전했습니다.” 민 대변인은 “회의 길이도 짧았고, 할 수 있는 얘기도 별로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아무 결론도 없이 끝난 이날 수석비서관 회의는 안 후보자의 갑작스런 사퇴에 청와대가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안 전 대법관을 후임 총리로 내정했을 때 청와대 관계자들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정말로 큰 맘 먹은 것”이라는 설명을 내놨었다. ‘한 번 찍히면 끝’이라는 박 대통령의 용인술과 스타일을 감안할 때 그를 등용한다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으로서는 큰 결단을 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새누리당 비박계와 심지어 야당 인사들 사이에서도 안 후보자에 대해 “박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의 총리 카드”라는 평가가 나왔다.
더욱이 안 전 대법관이 총리에 내정됐다는 사실은 지난 5월 22일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의 경질 소식과 함께 발표됐다. 박 대통령이 소위 ‘넘버 3’와 ‘넘버 4’를 한꺼번에 읍참마속하는 것과 동시에 제1호 인적쇄신 카드를 꺼내 보인 것이다. 박 대통령도, 청와대 참모들도 이것으로 세월호 참사 이후 한 달 넘게 이어져온 애도 국면에서 본격적인 수습 국면으로의 전환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했을 법하다. 그런 기대주가 국회 인사청문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난타당한 것도 모자라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청와대가 멘붕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안 후보자와 관련해 청와대가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26일부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안 후보자는 이날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제출에 즈음한 입장’을 통해 고액 수입 및 전관예우 논란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히고, 변호사 시절 거둔 수입 11억 원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내정 바로 다음날인 5월 23일부터 제기됐던 전관예우 의혹과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정면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안 후보자는 이미 4억 7000만 원을 기부한 바 있어, 이날 대국민 약속을 통해 사실상 변호사 활동을 통해 거둔 수입을 전액 사회에 내놓게 된 셈이었다.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그의 승부수는 곧바로 역공을 당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 등이 안 후보자의 기부행위가 정홍원 총리의 사의 표명 이후 이뤄졌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사전검증 과정에서 전혀 걸러지지 않은 내용이었다고 한다. 변호사로 일하면서 다소 많은 수입을 거뒀지만 변호사 활동 기간이 길지 않았고, 또 수입의 30% 정도를 기부했다는 게 일종의 면죄부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가 흔들리게 됐다. 이때부터 청와대 내에서는 안 후보자의 낙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제기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후보자의 사퇴는 본인의 강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는 게 청와대와 본인, 양측의 공통된 주장이다. 청와대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내심 안 후보자 측이 각종 공세를 잘 극복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가 정치적 부담을 우려해서 안 후보자를 주저앉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정반대”라며 “그를 주저앉힌다는 것 자체로 실패한 인사라는 점을 자인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겠나. 안 후보자가 정치력을 발휘해 살아남기를 기대했었다”고 전했다.
이런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그야말로 밑바닥까지 떨어진 형국이다. 청와대 내에서 현 시국을 9·11 테러 참사 현장인 미국 뉴욕 ‘그라운드 제로’에 비유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을 정도다. 안대희 내정, 남재준·김장수 경질로 6·4 지방선거를 치르고, 선거 이후 안대희 인사청문회 기간 동안 내각과 청와대 참모진에 대한 개편을 준비한 뒤 안대희 총리의 정식 취임 뒤 내각·청와대 개편을 단행하려던 박 대통령의 로드맵은 완전히 헝클어졌다. 인적쇄신에 시동을 걺으로써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부담을 덜어주려던 구상도 물거품이 됐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김기춘 실장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코너에 몰렸다는 점이다. 야당이 “김 실장 경질 없는 인적쇄신은 무의미하다”고 공세를 펴는 데 그치지 않고 김성태·홍일표 등 새누리당 의원들도 공개적으로 김 실장 교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특히 ‘안대희 낙마’는 검증 부실로 인한 전형적인 ‘인사 참사’라는 점에서,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실장에게 책임의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남재준·김장수는 경질하면서 왜 김기춘은 안되느냐”는 야당의 공세에 더 이상 “남재준·김장수는 교체할 만한 사유가 있었지만 김기춘은 없었다”는 논리로 대응하기 어렵게 됐다. 김 실장의 거취가 인적쇄신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돼 버린 셈이다.
이는 박 대통령에겐 말 그대로 심각한 타격이다.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측근들도 내치는 상황이 되는 바람에 김 실장은 박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박 대통령을 보좌했던 한 인사의 우려 섞인 설명이다.
“인사검증 책임자인 홍경식 민정수석, 정부조직법 번복 논란을 자초한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등과 김기춘 실장은 전혀 무게감이 다른 사람이다. 남재준·김장수를 포기하면서도 대통령이 김 실장을 남겨둔 것은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방선거 이후 내각과 청와대 물갈이, 공직사회 개혁, 세월호 참사 수습 마무리 등을 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이 김 실장 같은 참모 없이 이런 엄청난 일들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김 실장과 함께 정국을 수습하겠다는 구상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김 실장이 남아 박 대통령을 돕는 게 오히려 정치적으로 부담만 될 뿐이라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내각과 청와대 인적쇄신 논란이 지방선거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감안, 선거 전에 김 실장의 거취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안대희 낙마는 접전지의 당락에는 충분히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라며 “새누리당의 지방선거 전망이 어두운 상황인데, 이런 때에는 최소한 ‘대통령 때문에 졌다’는 얘기는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선거 전에 김 실장 문제를 매듭짓지 않으면 앞으로 이 문제가 당청 갈등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주장은 지방선거 이전에 김 실장이 사퇴하는 등 청와대 참모진 개편이 시작될 가능성을 주목하게 한다. 박 대통령이 상징적으로나마 강한 인적쇄신 의지를 보여줄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당장 김 실장이 사퇴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얘기”라는 반응도 만만찮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다 물러나면 사태 수습은 누가 하느냐”고 되물으며 “욕먹을 건 먹고, 매 맞을 건 맞더라도 청와대와 여당으로서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이 물러나더라도 지방선거 이후 새 총리를 내정하고 내각과 청와대 개편을 동시에 추진한 뒤에야 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라운드 제로’의 위기 속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온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