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며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남벌>에 이르는, 그의 극화가 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끌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미친 듯이 자기를 던져 만화를 그렸다. 자기 안에 빙점 속에 웅크리고 앉아 어찌할 줄 모르는 내면의 아이들을 꺼내 생명을 부여했다. 그들이 까치고, 엄지고, 마동탁이다. 그가 말한다.
“까치는 내 마음 속 순수, 마동탁은 출세하고 싶은 내 욕망이었습니다. 그들은 둘이 아닙니다. 빛과 그림자였던 거지요.”
그리고 보니 우리가 사랑했던 까치의 경쟁자, 성공을 향한 열망 속에서 살짝 비겁해지기도 하는 마동탁이 단순한 악이 아니라 매력 있는 악이었던 이유를 알겠다. 마동탁은 까치를 한편으론 질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보다도 까치를 이해했던 악이었던 것이다.
자기 속의 빙점에서 까치를 빚고, 엄지를 빚고, 마동탁을 빚고 백두산을 빚은 천재답게 그의 인생은 한편의 드라마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남벌>,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까지 승승가도를 달리다 <아마게돈>이란 애니메이션을 만들며 참담하게 실패하고, <천국의 신화>를 쓰면서는 검찰에 고발되어, 6년이라는 긴 법정다툼을 하게 된다.
“세계 어디를 봐도 창조신화가 있는데, 우리만 없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사라진 거지요. 그 사라진 공백을 상상했습니다.”
이미 <남벌>로 일본 군국주의를 예상, 이현세가 예언자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그 상상이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을 거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천국의 신화>는 그의 인생의 중요한 공백이었다.
“6년 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기막혔는지요.”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그 과정은 고독했고 결과는 허망했단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그 공백은 결코 허망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우연히 강가에서 피라미들이 노는 걸 봤어요. 뭐에 홀린 듯 1시간 이상 들여다봤지요. 그들이 열심히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는데 언제나 그 자리더라구요. 인간의 역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 거예요. 열심히 바꾸려고 하지만 그 흐름을 바꾸는 건 피라미들이 아니라 도도한 강물의 흐름이라는 생각!” 그 후로 역사를 투쟁의 관점이 아닌 순리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정말 까치처럼 참 많은 고난을 겪었다. 그런 고난을 겪으면서 그의 인생에서 까치를 완성해가는 듯했다. 그런 고난을 견딘 힘은 순정파 마초답게 “대책 없고, 이유 없는 자신감”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힐링 열풍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젊은이들이 고난 앞에서 나약하게 징징거려서 안 된다는 것이다. 고난은 극복해야 할 것이지 힐링의 그늘에서 체념하고 굴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남자가 사라진 시대에 남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