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세래 감독의 추억
조 감독은 자신이 “나는 영화인인 동시에 바둑인”이라면서 공언하고 했다. “본무대는 충무로였으나 돌이켜보면 늘 한 발은 관철동에 있었다. 충무로에서 연출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숨 가쁘게 달리다가 좀 쉬어야겠다 싶으면 관철동을 어슬렁거렸고 기웃거렸다. 아니다. 마음은 오히려 관철동에 있으면서 몸이 충무로에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도 든다”라고 토로하던 열렬 바둑팬이었다. 하긴 그가 불철주야 영화를 생각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가 그토록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의 주제와 소재는 바둑이었다. 그 시간이 30년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무렵이었다. 나는 바둑 주간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책 세 권을 들고 왔었다. <역수(驛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 1-2-3권이었다. 바둑소설이라고 했다. 신간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우선 그 분량에 압도당하면서, <역수>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신간안내는 내가 부탁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설명을 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마살이 있어 물처럼 흘러간다’ 대충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외람되이 말하지만 ‘역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소설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유명 무명 작가들 가운데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 바둑소설을 발표한 것은 있었지만 바둑을 이야기의 소품으로 다루지 않고, 바둑과 정면대결한 소설은 <역수>가 최초였다.
<역수>를 신간안내하려면 책을 읽어야 했는데,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단숨에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신간안내 대신 신문에 연재를 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역수’가 무슨 말이냐고 묻는 독자가 많았다. ‘역수’는 몇 년 후 문패를 ‘승부’로 바꾸어 달고 다시 선을 보였고, ‘역수’ 때보다 훨씬 많이 팔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 감독이 그걸 영화화한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소문은 10여 년 동안이나 소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고 조세래 감독의 바둑 영화 <스톤>의 장면들. 조 감독의 아들 조동인(왼쪽 사진)과 배우 김뢰하(오른쪽 사진 왼쪽)가 주연을 맡았다.
재작년인가 어느 바둑 인터넷 사이트에서 바둑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리기에 신문에 쓴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조 감독이 찾아왔다. 거길 좀 소개해 달라는 것이었다. 3억 원이면 된다고 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보류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다시 조 감독을 만났을 때 진행을 물었다. 2000만 원이나 3000만 원, 그 정도씩 구하는 대로 찍다가 쉬다가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물었다. 왜 그렇게 매달리는 거지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언필칭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인생이 바둑의 축소판 같지만, 그렇다면 바둑만한 소재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흥행도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자신이 있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꿈이겠지요. 그러나 이거 보세요. 아니, 내가 만들고 싶은 걸 만드는 거지요.
시니어 프로기사들의 경연장, 서능욱 9단이 기염을 토한 기전 ‘대주배’의 후원자 김대욱 사장이 <스톤>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조 감독과 김 사장은 모르는 사이였다. 조 감독은 지인의 소개로 김 사장을 찾아가 단도직입으로 투자하라고 말했고, 김 사장은 즉석에서 오케이했다는 것.
그가 암과 싸우고 있다는 걸 잘 몰랐다. “바둑이 돌이고, 내가 돌이거든…^^” 내가 돌이라는 말을 그때는 흘려들었다. 미련하게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반어적 표출이라고만 알았지, 그게 진짜로 자신의 내장에 돌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시사회 무대에 선 두 주연배우.
“조 감독이 내기바둑 두는 걸 여러 번 구경했다. 그런데 묘한 것이 누구와도 밤새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새벽녘에, 자 이번이 막판, 하면 그 판은 언제나 이겼다. 그는 나와 비슷한 실력의 사람하고도 맞두었고, 내가 두 점을 접히는 사람에게도 맞두어 이겼다. 언젠가 속내를 밝혀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제 가고 없으니 결국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스톤>과 <신의 한 수>의 소재가 내기바둑인 것에 대해서는 “왜 하필 내기바둑이냐. 그리고 꼭 폭력을 넣어야만 재미가 있는 것이냐”는 지적도 있지만, “어쨌거나 바둑영화가 나왔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바둑을 영화로 만들어도 재미가 있네, 그런 걸 알게 해 준 것만도 어디냐”는 환영파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스톤>과 <신의 한 수>가 관객동원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조 감독은 편집까지 마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스톤>과 <역수>, <스톤>과 <승부>는 내용이 같지 않다. 그러나 <스톤>의 출발점이 <역수>인 것은 분명하다. <스톤>의 주인공 청년 조동인이 조 감독의 아들이라는 것도 시사회에서 알았다. 역수. 굽이돌아 흘러가는 물의 정거장.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곳. 나는 기보 없는 바둑영화에 대한 회의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역수>가 바둑소설이고 바둑영화라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