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아빠 숨진 후… 재단-기금 ‘저작권’ 줄다리기
안네 프랑크 생전 모습.
현재 암스테르담에는 안네 프랑크를 기념하는 장소가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실제 안네의 가족들이 살았던 ‘비밀의 집’이 있는 건물이자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안네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5월 8일 연극 <안네>를 초연하면서 개관한 ‘안네 프랑크 극장’이다. ‘안네의 집’은 현재 ‘안네 프랑크 재단’이, 그리고 ‘안네 프랑크 극장’은 ‘안네 프랑크 기금’이 운영하고 있다.
‘안네의 집’과 ‘안네 프랑크 극장’ 사이의 거리는 도보로 30분 정도로 비교적 가까운 편에 속한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와는 달리 두 단체의 사이는 가깝지 못하다. 문제는 ‘안네 프랑크’라는 이름의 소유권과 안네 프랑크가 쓴 일기의 저작권을 둘러싼 갈등이다.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세운 ‘안네 프랑크 기금’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 둘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주장해왔다. 최근에는 함부르크 법원에 저작권 소송을 제기했는가 하면, ‘안네 프랑크 기금’에서 명예고문직을 맡고 있는 유대인 주간지 <타흘레스>의 편집장인 입스 쿠겔만은 “<안네의 일기>의 저작권은 오로지 ‘안네 프랑크 기금’이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 사이의 갈등은 비단 저작권 문제를 둘러싼 것만은 아니다. 생전에 오토 프랑크가 그러했듯이 쿠겔만 역시 ‘안네의 집’ 운영 방식을 비난하고 있다. 쿠겔만은 “오토 프랑크는 안네 가족이 숨어 살았던 ‘비밀의 집’이 마치 순례자들의 성지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재 ‘안네의 집’의 모습은 성지와 다를 바 없다”라고 비난했다.
사실 그의 이런 주장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안네의 집’은 1960년 일반인에게 개방된 이후 현재 매년 130만 명이 찾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관광 명소 가운데 하나다. 건물 앞에는 매일같이 줄이 길게 늘어서 있고, 유럽, 미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쿠겔만의 비난에 대해 ‘안네의 집’ 박물관장인 로날드 레오폴드는 ‘안네 프랑크 극장’의 값비싼 티켓 가격을 꼬집었다. 그는 “와인과 스낵박스 또는 저녁식사가 포함된 티켓을 팔다니 이해할 수 없다”라며 맞받아쳤다.
두 단체가 이렇게 적대적이 된 것은 어쩌면 두 단체를 세운 장본인인 오토 프랑크의 변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토 프랑크는 1957년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한 무리의 시민들과 함께 ‘안네 프랑크 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처음 ‘안네의 집’이 일반인에게 개방될 때도 가장 기뻐했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경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가족들이 숨어 지냈던 집을 둘러볼 때만 해도 그는 불쾌해 하기는커녕 적극 협조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이런 기쁨은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재단이 점차 ‘안네의 집’을 개조하고, 증축하고, 또 정치적 활동에까지 참여하자 한발 뒤로 물러섰던 오토 프랑크는 결국 재단에서 손을 떼기에 이르렀다.
이유인즉슨, 재단이 정작 유대인들이 처한 문제와 어려움에는 신경 쓰지 않고 이런저런 사회적 활동에 딸을 이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단의 운영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그는 1963년 자선단체인 ‘안네 프랑크 기금’을 설립했다.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안네의 집.
하지만 현재 <안네의 일기> 원본의 소유권은 오토 프랑크도 아닌, 또한 ‘안네 프랑크 기금’도 아닌 네덜란드 정부가 갖고 있다. 오토 프랑크가 사망 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했던 이 원본은 현재 ‘안네의 집’에 영구 임대 전시되어 있다. 단, 일기에 대한 판권은 생전에 오토 프랑크가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현재 ‘안네 프랑크 기금’이 보유하고 있다.
‘안네 프랑크 재단’과 ‘안네 프랑크 기금’은 규모로 따졌을 때에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안네 프랑크 재단’의 직원은 150명인 반면, ‘안네 프랑크 기금’은 수십 명에 불과하다. 또한 ‘안네 프랑크 재단’의 1년 예산이 1400만 유로(약 193억 원)인 데 비해 ‘안네 프랑크 기금’의 수익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수백만 유로에 불과하다.
이는 어쩌면 오토 프랑크의 성격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1947년 딸의 일기를 출간한 후 큰 성공을 거두었던 그는 하지만 곧 심한 갈등에 휩싸였다. 그는 결코 딸에 대한 대중의 숭배를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딸의 일기가 인기를 얻자 곧 나치 아래 희생됐던 수많은 유대인들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했고, 또 안네의 언니인 마고트를 생각하면서 슬퍼했다. 동생 안네에게 가려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 두 딸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에게는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람들이 안네의 이야기를 그저 감상적으로만 대하는 것에 불만을 가졌었다. 그보다 그는 일기를 읽고 받은 사람들의 충격이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이용되길 바랐었다. 그가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둔 연극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오토 프랑크는 세상을 떠났으며, 이제 ‘안네 프랑크 기금’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새롭게 문을 연 ‘안네 프랑크 극장’의 연극 <안네>의 초연 무대에는 빌렘 알렉산더 네덜란드 국왕이 초대됐으며, 앞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연극이 성공을 거두길 바라고 있다.
안네 프랑크 사망 70주기를 맞는 내년에는 ‘안네 프랑크 기금’이 처음 제작에 참여하는 두 편의 영화도 제작된다. 이 가운데 극장판 영화는 기존의 영화와는 달리 안네와 마고트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다룰 예정이어서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에는 사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력에 의존한 팩션일 수밖에 없다.
한편 <슈테른>은 <안네의 일기>가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이 읽히고 있는 이유에 대해 “이 한 권에는 인종차별, 공포, 헛된 희망, 배반, 추방 등 나치 시절의 모든 드라마가 한데 담겨져 있다”고 말했다. 또한 후세대 독자들이 홀로코스트와 집단학살에 대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 또한 <안네의 일기>가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라고 지적했다.
이밖에 안네 프랑크가 낙관론자였다는 점, 전 세계 모든 청소년들이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 그리고 유대인 수용소에서 보냈던 비극적인 몇 달을 상상 속에서만 머물게 했다는 점 또한 일기가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고 있는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숨은 뒷얘기 일기 속 ‘키티’는 누구? 처음엔 ‘코니’ ‘에미’ ‘포프’… 안네의 일기장과 지난 5월 8일 연극 <안네>를 초연하면서 개관한 ‘안네 프랑크 극장’. 이 극장에는 안네 프랑크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안네가 선물 받았던 일기장은 사실 방명록이었다 안네가 13세 생일 선물로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일기장은 사실은 일기장이 아니라 방명록이었다. 이 작은 방명록에 일기를 써내려갔던 안네는 하지만 방명록이 꽉 차자 다른 공책 두 권에 계속해서 일기를 썼다. 공책을 구하기 어려웠던 때라 공책을 다 쓴 후부터는 아래층의 사무실에서 몰래 전달받은 낱장 종이에 일기를 써야 했다. 이렇게 일기를 쓴 종이는 360장 정도 된다. ▲ ‘키티’는 누구였나? <안네의 일기>는 안네가 ‘키티’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키티’는 누구일까? 이와 관련, 학자들의 주장은 엇갈리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키티’가 전쟁 발발 전 사귀었던 안네의 유대인 친구인 케테 ‘키티’ 에쥐에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훗날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에쥐에디는 “일기 속의 ‘키티’는 아마 내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키티’가 안네가 좋아했던 소설 <윱 테 호일>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 이름이 바로 ‘키티’였다. 하지만 <안네의 일기>가 처음부터 ‘키티’에게 쓴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쓴 일기에는 ‘코니’ ‘마리안느’ ‘에미’ ‘포프’ 등 다양한 이름이 등장한다. ▲ 안네의 가족을 밀고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1944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 독일 경찰서로 익명의 남성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당시 이 남성은 안네의 가족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정확한 주소와 함께 비밀의 집에 이르는 통로를 가르쳐줬다. 이에 안네의 가족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 경찰과 네덜란드 보안경찰에 의해 전부 체포됐다. 지난 60여 년간 안네의 가족을 비극에 빠뜨린 밀고자의 정체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안네의 가족을 체포했던 독일 경찰마저도 전화를 걸었던 남성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주장했으며, 경찰서에도 그 미스터리한 인물에 대한 서면 기록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동안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이 한 명 있긴 했다. 안네의 가족이 숨어 있던 집에 붙어 있는 창고에서 일하고 있던 빌렘 반 마렌이라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친 경찰 조사 결과, 이 남성과 안네 가족의 비극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71년 세상을 떠났던 마린은 눈을 감을 때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었다. 당시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자 많은 역사가들은 밀고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안네의 가족을 밀고한 범인이 누구인지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두 가지 제기됐다. 영국의 작가이자 안네 프랑크 전문가인 캐롤 앤 리는 <오토 프랑크의 숨겨진 인생>이라는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그녀가 의심한 인물은 안톤 알러스라는 남성이었다. 오토 프랑크의 동업자이면서 나치에 열광했던 알러스는 당시 사업이 망해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에 그가 노렸던 것은 나치가 지급하는 유대인 신고 포상금이었다. 리는 책에서 “틀림없이 알러스가 배신자였다. 그는 안네의 가족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심지어 알러스의 가족들도 그가 배신자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알러스의 어머니를 인터뷰했던 리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알러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좋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항상 나치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다녔다고 말했다”라고 전했다. 또한 리는 “알러스가 경찰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누군가에게 안네 가족의 소재를 알려주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러스의 제보를 받고 경찰서에 전화를 건 인물은 당시 유대인을 신고해서 포상금을 타는 것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마르텐 퀴퍼라고 그녀는 추측했다. 무엇보다도 안네의 가족이 독일 경찰에 의해 발각되기 불과 며칠 전에 그가 알러스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는 사실을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멜리사 뮐러는 다른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녀가 지목한 인물은 창고의 청소부였던 레나 하르토그였다. 전쟁 중에 아들을 잃었던 그녀로 하여금 경찰에 전화를 걸도록 했던 것은 바로 ‘두려움’이었다. 오토 프랑크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이 유대인을 도운 사실이 발각될 경우 추방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서 결국 안네의 가족을 신고했다는 것이 뮐러의 주장이다. ▲ 안네는 가스실이 아닌 유대인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안네는 장티푸스에 걸렸던 언니 마고트가 침대에서 떨어져 죽은 지 3일 후에 역시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 일기를 처음 발견했던 미에프 기스가 일기를 먼저 읽었다면 <안네의 일기>는 지금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오토 프랑크에게 안네의 일기를 건네주었던 사람은 미에프 기스라는 여성이었다. 안네의 가족들이 숨어 지내도록 도와주었던 기스는 ‘비밀의 집’에서 안네의 일기를 발견한 후 언젠가 돌아올 안네의 가족들에게 일기를 전해주기 위해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스는 훗날 “만일 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았더라면 아마 폐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안네의 가족을 도운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독일 경찰의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녀 역시 두려움에 일기를 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안네의 일기>는 위조됐다? <안네의 일기>가 가짜라는 주장은 지난 수십 년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관련, 1980년 <슈피겔>은 독일연방범죄수사청(BKA)이 실시한 조사 결과를 인용해 “안네 프랑크의 일기 가운데 일부는 안네가 직접 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일기 가운데 낱장 종이를 묶어 출간한 4권이 그렇다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볼펜’에 있었다. BKA가 특수 장비를 동원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안네의 일기 가운데 일부는 1951년에 수정 혹은 첨가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 볼펜으로 써졌다는 데 있었다. 1951년 이전에는 볼펜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이에 BKA는 4권은 아마 훗날 다른 사람에 의해 추가되었을 것이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볼펜이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전쟁 당시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팔뚝에 중요한 정보를 기록할 때 볼펜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볼펜이 처음 개발된 것은 1938년이었다. 헝가리 한 기자가 기사를 쓰다가 잉크가 마르는 펜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개발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