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는 김씨의 귀국으로 이 사건은 30개월 만에 드디어 그 완전한 실체가 드러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또 다른 의문점만 더하고 있다. 멀쩡하게 해외로 빠져나간 그가 불과 2년 6개월 만에 난치병에 걸려 되돌아온 탓이다. 아울러 김씨의 입을 통해 명확히 드러날 것처럼 보였던 진실이 그대로 묻혀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시계추를 다시 2년 6개월 전으로 되돌려 보자. 2002년 2월16일 새벽 2시께. 서울 강남 역삼역 앞 도로에서 뺑소니 사고가 일어났다. 피해자는 당시 28세의 회사원 정아무개씨. 그는 사고 차량에 의해 12m나 튕겨나간 뒤 사망했다. 강남경찰서는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범퍼 조각으로 유사 차량의 차주 1백66명을 추적해 나갔다. 유력한 용의차량 소유자로 장씨의 아들 김씨가 지목되었으나, 그는 이미 해외로 도피한 뒤였다.
경찰은 김씨의 가족을 통해 귀국을 종용하면서, 주변 인물들을 수사해 나갔다. 재벌기업 J사의 2세 K씨와 인기 여성 탤런트 2명의 이름이 연이어 나왔다. 사건발생 한 달 보름 만에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진실게임’의 논란이 확산되는 가운데 경찰측은 김씨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잠정 종결했다.
K씨와 두 탤런트 등의 경찰 진술에 의해 밝혀진 당시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김씨는 친구인 K씨와 탤런트 이아무개씨를 15일 저녁 만나,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반주를 겸해 저녁식사를 했다. 밤 9시께 탤런트 이씨는 먼저 귀가하고, 김씨와 K씨가 인근 룸살롱 두 곳을 돌며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셨다.
16일 새벽 2시께 김씨는 자신의 승용차 에쿠스를 몰고 역삼역 앞을 지나다가 근처에서 택시를 잡기 위해 서 있던 정씨를 치어 숨지게 했다. 이때 K씨는 다른 차량을 몰고 김씨 뒤를 따르다 사고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를 낸 김씨는 바로 차를 몰아 앞서 만났던 탤런트 이씨의 신사동 집으로 찾아갔다. 이씨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김씨가 만취한 채 소란을 일으키자 집 문을 열어주고 자신은 집 근처 한증막으로 피했다. 김씨는 이씨의 코디네이터 휴대전화로 또 다른 탤런트 이아무개씨를 불렀다.
새벽 3시께 또 다른 탤런트 이씨는 자신의 코디네이터와 코디네이터의 남자 친구 안아무개씨와 함께 탤런트 이씨의 신사동 집 앞으로 가서 김씨를 만나 한남동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셨다. 약 한 시간 뒤 김씨는 이 탤런트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2시께. 김씨와 그의 동거녀는 K씨를 다시 만났고, 사고 수습을 의논한 끝에 안아무개씨를 불러내 사고 차량을 수리해서 팔게끔 했다. 이어 4시께 김씨는 K씨의 차를 타고 인천공항을 통해 대만으로 출국했다.
그 이후 K씨는 범인은닉 등의 혐의로 구속됐고, 온갖 구설수에 시달렸던 2명의 탤런트는 경찰 조사 결과 뺑소니 사고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명났다.
하지만 이 같은 경찰의 결론에 일대 혼선이 일게 된 것은 옥중에 있던 장영자씨가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전혀 상반된 정황을 밝히면서부터였다. 장씨는 옥중 편지를 통해 “당시 사고 차량을 운전한 사람은 내 아들이 아니라 K씨였으며, 아들은 만취한 채 함께 술을 마신 두 여성 탤런트와 함께 뒷좌석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 그는 “K씨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아들을 직접 외국으로 내보내고, 정작 경찰 진술에서는 아들이 범인인 것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장씨의 설명대로라면 당초 김씨와 K씨, 그리고 두 탤런트 등 4명이 함께 술을 마셨으며, 이후 함께 차로 이동하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를 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셈이다.
당시 옥중 장씨의 이 같은 주장은 해외 도피 행각을 벌이면서도 가족들과는 연락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김씨가 자신만이 주범으로 몰리자 벼랑끝에 몰린 심정에서 억울함을 가족들에게 호소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그러나 당시 K씨와 두 여성 탤런트는 이에 대해 “장씨가 무슨 의도로 그런 근거 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경찰 역시 K씨와 두 여성 탤런트에 대한 조사를 통해, 장씨의 주장이 근거가 희박하다고 보고 김씨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경찰은 김씨 가족측에게 “자신이 결백하다면 빨리 귀국해서 조사를 받으라”고 종용했으나, 가족측은 “대만에 나간 김씨가 자신이 범인으로 몰린 것에 대해 충격을 받고 음독자살을 기도, 현재 병원에서 치료중이어서 귀국이 어렵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씨의 이번 귀국 역시 치료를 위해 해외를 전전했으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자 스스로 귀국을 결심했다는 것이 경찰의 전언이다. 강남경찰서의 담당 수사관은 “김씨가 해외에서 도피자 신세가 된 채 혼자 숨어다니는 생활을 한 관계로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에 따른 정신질환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며 “가족들은 그의 병명을 ‘대뇌수축증세’라고 한다”고 전했다.
이 수사관에 따르면 김씨는 현재 초등학교 수준 정도의 저능아 상태를 보이기 때문에 그의 누나와 매형인 탤런트 김주승 부부가 입국에서부터 경찰 조사까지 돌봐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에 따르면 그동안 김씨는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는 계속 끊임없이 연락을 취하며 국내 상황을 전해들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당초 대만으로 출국했다가 동거녀가 사업관계로 자주 오가는 이탈리아로 옮긴 후 최근에는 중국의 심양에 머물러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측은 “여전히 김씨측은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2년전의 결론을 뒤집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현재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된 상태. 검찰의 한 관계자는 “김씨의 상황이 좋지 않은 관계로 현재 조사중이나 어려움이 많다”면서 “그의 정확한 병명과 병세에 대해서는 현재 확인중에 있다. 다소 의심쩍은 면도 있으나 현재로선 단정짓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는 “필요하다면 2년전의 사건을 다시 원점에서부터 다시 들여다봐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동생 김씨를 돌보며 함께 경찰과 검찰 조사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누나 김씨 부부는 현재 전화도 받지 않는 등 외부 접촉을 피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신신당부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 뺑소니 사건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점을 안고 있다. 사고를 일으켰다는 김씨가 사고 직후 왜 잇따라 두 명의 탤런트를 찾았는지, 두 탤런트는 정말 사고 사실을 전혀 몰랐는지, K씨는 왜 사고를 목격하고도 신고하지 않고 태연히 인근 사우나를 찾았는지, 그리고 K씨는 왜 서둘러 사고 당일 김씨를 직접 배웅하며 해외로 나갈 것을 권유했는지 등이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범인이 아니라면 왜 김씨가 해외에서 음독자살을 결심했으며, 또 귀국하지 않고 2년이 넘게 해외를 전전하다가 이제 와서야 입국했는지, 그리고 저능아 상태에 빠진 채 오락가락한 진술을 반복하는 점 등이 이 사건을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