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12일 박관용 의장이 경호권을 발동하지 않았다면 탄핵안은 가결되기 어려웠다는 게 일반적인 정가의 분석이다. 그만큼 박 의장의 ‘적극적인’ 행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박 의장은 부산중-동래고-동아대를 졸업한 6선의 의원이다. 그는 국회의장이 어느 한 정당의 소속이던 시대를 마감해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국회의장을 끝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해 놓은 상태다. 국회의장이란 자리에 그만큼 애정과 긍지를 갖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그는 국회의장도 나라가 잘되도록 돕는 데서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행정부를 이해하고, 정부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데 최선을 다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 같은 박 의장의 철학에 비춰봤을 때도 이번 탄핵안 강행처리 때 모습은 잘 납득되지 않았다. 일각에선 박 의장이 대권욕심을 가진 게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의외의 행동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의장은 표결처리를 강행한 12일에 작심한 듯 행동에 나섰다. 오전 11시5분쯤 경위를 대동하고 본회의장에 들어설 때부터 그는 입술을 굳게 깨물고 있었다. 박 의장은 경위들이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하나둘 들어내는 모습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봤다.
경호권 발동은 전두환 정권 시절인 지난 86년 마지막으로 사용됐던 제도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군사독재정권의 유물인 경호권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경호권이란 물리력으로 말 안 듣는 국회의원을 제압하는 제도로, 국회의 파행운영을 전제하는 것이다. 국회의장이 어느 한 정당의 소속원이 아니라면 굳이 경호권을 발동하면서까지 국회를 운영할 필요가 없다.
특히 구태여 경호권을 발동하려면 국가에 시급한 현안 처리에 이용하는 게 그나마 명분있는 일이다. 박 의장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 등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결정적 악영향을 미치는 현안에 대해선 본회의 표결을 세 차례씩 하지 못하면서도 경호권을 발동하지 않았다. 당시 박 의장은 “실효성이 없고, 의원들의 몸에 어떻게 손을 댈 수 있나”란 명분을 댔다.
특히 국회는 인사에 대한 결정을 합의제로 운영하는 오랜 관례를 갖고 있다. 대통령 탄핵은 대통령의 거취에 관한 중요 사안인 만큼 다수결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 박 의장은 그럼에도 굳이 다수결 주의를 주장하며 경호권까지 발동했다.
박 의장은 본회의장에서 표결에 돌입하면서 제안설명을 서류로 대체시켰다. 자칫 표결이 지연될 수 있는 만큼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의도적으로 시간을 단축시켜 준 것이다. 표결을 종료하려다 이재오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아직 덜 끝났다는 표시를 하니 “이제 표결을 종료…”라고 하려던 말을 취소해 버렸다. 이후 한나라당 의원들이 종료 사인을 보내준 다음에야 종료선언을 했다.
▲ 지난해 8·15 기념식장에서 만난 박 의장과 노 대통령. | ||
박 의장은 13일 SBS 라디오에 출연, 몇 가지 의미있는 해명을 했다. 우선 경호권을 발동한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대화요청을 거절하는 등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 의장은 “10일 대화가 거절되고 11일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의장은 “12일 오전까지 경호권 발동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사실은 10일 이후부터 경호권 발동을 고민한 셈이다. 더구나 국회의장의 대화요청을 거절했다고 해서 탄핵안 처리에 앞장섰다는 것은 아무래도 명분이 약하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경호권 발동의 배경에 만에 하나 평소 박 의장의 노 대통령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박 의장은 “선거 이후 당(민주당)을 조각내고, 5분의 1도 안되는 수로 국회운영을 하려 하는지, 부부도 헤어지면 원수가 되는데, 민주당과 헤어지고 국회가 파행 운영돼 왔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40여 석으로 여당 행세를 하려는 데 대해 국회의장으로서 모욕감을 느꼈다는 의사표시다.
박 의장은 “지난 1년간 축적된 생각”이라고 말할 정도로 노 대통령에 대한 누적된 불만을 경호권 발동의 근본 이유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호권 발동이 단순히 충동적인 행동이라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준비된 비토행위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점들에 비춰보면 결국 탄핵안 가결은 국회의 수장인 국회의장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끌었던 셈이다. 사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탄핵안을 가결시킬 수 없었다.
국회는 2002년 국회법 개정을 통해 국회의장석을 이탈해 의안 처리를 할 수 없도록 만들어놨다. 날치기 처리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이는 거꾸로 국회의장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 것이다.
박 의장은 최병렬 대표와 친구 사이다. 항간에선 박 의장이 친구인 최 대표에게 의리를 보여주고, 자신의 친정인 한나라당에 큰 선물을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국회의장으로서 중립적 노력보다 노 대통령을 인정할 수 없다는 개인적 소신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국가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박 의장이 대권에도 욕심을 부리는 것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을 정도다. 그만큼 박 의장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부분을 지니고 있다. 박 의장은 탄핵안 가결 이후 며칠째 약간 들떠 있는 모습을 보였다.
5월 말 퇴임하는 박 의장은 현직 대통령을 탄핵한 첫 번째 국회의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