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광수 검찰총장(왼쪽), 최종영 대법원장 | ||
검사들은 대선자금과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 이후 청와대와 여권으로부터 받는 검찰 무력화 압력에 풀이 죽은 상태다. 판사들은 올해 대법원장을 비롯, 6명의 대법관이 바뀌는 것을 계기로 다시 한번 거센 정치적 돌풍에 휩싸일 것을 우려하면서 희망을 잃어가는 분위기다.
검찰의 위기감은 더 이상 최고 사정기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느끼는 데서 오고 있다. 3·4공화국 시절의 중앙정보부, 5·6공 시절 보안사령부에 이어 1990년대 문민정부 이후에는 검찰이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 사정 권력으로 자리를 잡아 왔다. 그러나 지난 국민의정부 때부터 알게 모르게 새나가던 검찰의 힘이 새 정부 들어서는 더욱 누수가 심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먼저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예전같지 않다. 과거 집권세력은 정치적으로 검찰을 이용하려 했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검찰도 권력과 적당히 타협하며 자신의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정부 들어 이 같은 ‘공생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새 정부 들어 청와대는 ‘검찰 독립’이라는 명분으로 검찰 수사 등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검찰의 힘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에서 참혹한 경험을 한 청와대와 여권에서 “검찰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놓아둬서는 안된다”는 얘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올 4월에 임명할 신임 검찰총장은 검찰 외부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검찰 사정권력을 대신할 공직부패수사처(공수처)의 신설도 이 같은 맥락에서 올해 더욱 힘을 얻을 전망이다.
검찰의 위기감은 초임 검사들을 포함한 아래로부터 강하게 전염돼 올라오고 있다. 재경 지역에 근무하는 한 평검사는 “젊은 검사들 사이에 사명감을 얘기하는 이들이 없어졌다”며 “검사들도 월급받은 대로 일하면 그만인 샐러리맨이 되고 있는 듯하다”고 토로했다. 한명 한명이 모두 독립된 국가기관인 검사들은 우리나라 최고 인재라는 자부심과 수사권을 통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권력감에 취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달콤한 기억은 이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 최고 인기 부서였던 공안부와 특수부에 지원하는 젊은 검사들도 급감하는 추세여서 검찰 수뇌부는 골치를 앓고 있다. 공안부야 지난 정부 때부터 찬밥으로 밀려났지만 특수부조차 이제 기피 부서가 되고 있다. 특수부에서 거물 정치인과 재벌 등을 고생고생하며 잡아들여도 결국 상처는 고스란히 검사들이 받게 되고 이에 대한 보호망이나 보상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 검사들은 상대적으로 편한 형사부나 기획파트 쪽을 선호하고 있다. 특수통인 한 중견 간부는 “골치 아픈 일은 피하고 그저 자신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젊은 검사들이 많아지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검사들은 대부분은 이 같은 상황변화가 새 정부 때문이라며 원망하고 있다. 재경 지검의 한 중견 간부는 “여권에서는 검찰의 개혁의지가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뭘 어떻게 더 바꾸라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불만은 그저 술자리 등에서나 폭발할 뿐 검사들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인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만약 새 검찰총장이 외부에서 오는 ‘수모’가 더해진다면 검찰의 열패감은 더욱 심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법원도 사정이 비슷하다. 올해는 대법원장을 비롯 총 6명의 대법관이 교체되는 해다. 전체 대법관(14명) 중 절반 가까이가 바뀐다면 법원은 기대와 희망에 들떠 있어야 하지만 분위기는 정반대다.
예전같으면 법원 내에서 존경받던 고등법원장이나 지방법원장 등이 대거 대법관으로 승진했겠지만 올해는 이를 기대하기가 힘들다. 지난해 기수와 서열 파괴를 통해 김영란 대법관이 탄생했던 파격 인선이 올해도 이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 ||
올 8월 임명될 신임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들의 면면을 봐도 기존 법원 분위기에 비우호적인 외부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대법원 관계자도 “올해 임명될 6명의 대법관 중 절반 정도만 내부 승진으로 결정돼도 다행이라는 분위기가 법원 내에 팽배하다”고 말했다. 벌써부터 올 2월에 퇴임하는 변재승 대법관 후임 선정을 앞두고 대법원 주변은 전운이 감돌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흐름이 젊은 법관들의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수도권 지역의 한 중견 판사는 “임용되는 순간부터 모든 법관들은 대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며 “그 꿈이 밤을 새가며 사건기록을 검토해서라도 훌륭한 판결문을 써 인정받겠다는 노력으로 연결돼 왔다”고 말했다. 법원의 엘리트 법관들은 대법관이 되겠다는 목표로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훌륭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와 더불어 몸가짐도 조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대법관이라는 최고의 영광이 능력과 품성을 인정받아 차곡차곡 승진한 법관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부여되는 시대가 왔다.
법관들의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소장 판사는 “이제 누가 대법관이 될지에 대해 별 관심도 없다”며 “그저 분란이나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털어놓았다. 대법원에서도 법관들의 사기저하가 판결의 질 저하로 연결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변화는 검찰과 법원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대적 대세라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분석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민주화가 덜된 권위주의 정권 시절 우리나라 검사와 판사들이 누렸던 막강한 권력은 비정상적인 것이었다”며 “검찰과 법원의 힘이 빠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합리화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꼬집었다.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 구름 위에서 살고 있다는 환상 속에 빠져있던 검사와 판사들도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올 때가 됐다는 얘기다. 그 과정이 연착륙이 될지 거친 추락이 될지는 검찰과 법원의 반발 수위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