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신 사라지고 오기만 남아” 비박계 의원
정홍원 총리가 유임 후 첫 일정으로 지난 27일 오후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아 세월호 참사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당직을 맡고 있는 한 의원은 “일종의 극약처방인데, 말 그대로 먹고 죽는 극약이 될 수도 있다”고 당혹감을 토로했다. 이번 결정이 세월호 참사 정국에서 탈출하기 위한 박 대통령의 승부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자신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의 말이 보여주듯 박 대통령의 정 총리 유임 결정은 여권 내에서도 위태위태한,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박 대통령의 이번 결정이 대국민 ‘마이 웨이’ 선언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박 대통령이 보다 폭넓은 인재를 등용하고, 보다 폭넓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주문이 잇따랐다.
김문수 전 경기지사, 김무성 의원 등 비박(비박근혜)계 인사는 물론 김병준 국민대 교수, 한화갑 전 의원 등 야권 출신 인사라도 데려다 써야 한다는 주장이 새누리당에서도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박 대통령이 이전과 달리 개방적인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폭 좁은 국정운영과 인재 발탁 시행착오의 원흉으로 지목돼 온 김기춘 비서실장에 대한 경질론이 터져 나온 것도 그 연장이었다. 동시에 책임총리제, 책임장관제 실현을 통해 박 대통령이 ‘만기친람식 국정운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박 대통령의 정 총리 유임 결정은 각계의 주문에 대한 공개적인 거부로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하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한 의원은 “총리 내정자가 2명이나 연거푸 낙마했는데도 인사검증 책임자인 김 실장을 싸고 돈 것도 모자라 이미 식물총리가 된 지 오래인 정 총리를 유임시킨 것은 ‘앞으로도 친정체제로 가겠다’는 선언과 다를 게 없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친박계 핵심인 최경환 의원을 경제부총리로 포진시키고 안종범 조윤선을 청와대 수석에 앉힌 것은 일종의 징조였음이 분명해졌다”며 “최악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쇄신은 사라졌고 오기만 남았다”고 일갈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도 “문창극 전 내정자의 낙마가 기정사실로 굳어져 갈 무렵 ‘정 총리 유임설’이 돌았는데, 청와대 직원들조차 설마 하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며 “정 총리가 유임된 것은 우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박 대통령이 인사 참사 방지책으로 제시한 청와대 인사수석실 신설 방안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는 것 역시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는 의혹 때문이다. 인사수석실을 새로 만들면서 김기춘 실장이 위원장을 맡는 인사위원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조치라는 얘기다. 야권에선 “인사수석을 신설함으로써 앞으로 인사 참사가 재연되더라도 책임론이 김 실장에게 향하는 것을 막겠다는 꼼수일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제공=청와대
실제로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총리 교체와 내각 개편을 대하는 야당의 전략은 철저하게 7·30 재·보궐선거에 맞춰져 있다”며 “지금 분위기에서는 누구를 총리 후보로 내세워도 야당의 흔들기에 배겨낼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잇단 총리 후보자 낙마 사태의 원인을 야당의 발목잡기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이런 청와대 분위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심지어 “국회 인사청문위원회 위원들을 검증하겠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이는 향후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와 8개 부처 장관들에 대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야당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선공의 성격을 띤다. 야당의 공세에 끌려 다니지 않고 ‘발목 잡는 야당론’으로 맞불을 놓겠다는 심사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대야 강경론을 들고 나온 게 지난 6월 25일 박 대통령과 이완구 원내대표,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 간의 만남 직후부터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튿날인 26일에는 정 총리 유임 발표와 함께 박 대통령이 전국 상공회의소 회장단과 오찬 간담회를 가졌고, 27일에는 고위 당·정·청 회의에서 부동산 규제 완화 등 경제활성화 대책이 논의됐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민생과 경제’를 전면에 걸고 야당의 공세에 맞설 가능성을 보여준다. 정 총리 유임 결정에 대한 비판도 “민생과 경제를 챙기기 위해 조속한 내각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논리로 넘어서겠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박 대통령과 여권 수뇌부의 이런 승부수에 대해 “민심이반의 심각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한 정치평론가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 평가층이 긍정층보다 많아지고, 심지어 보수층 내부에서도 민심이반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국민이 지지하지 않고 심지어 여당 내에서도 당권 주자들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끊이지 않는데 무슨 수로 상황을 정면돌파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