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당한 돈 메우려 ‘그 여자’ 수법 그대로…
영화 <타짜>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이때부터 김 씨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을 ‘의문의 투자’에 쏟기 시작했다. 자신의 돈만으로 부족했던 김 씨는 “좋은 투자가 있다”며 아버지를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김 씨는 아버지를 설득해 마련한 전 재산 3억 원을 아무런 의심 없이 투자에 쏟아 부었다. 몇 달간 김 씨의 손에는 큰 이자 수익이 들어왔다. 김 씨는 이자 수익의 대부분을 아버지에게 송금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기적으로 들어오던 이자 수익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김 씨는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투자한 원금 3억 원이라도 되찾기 위해 무역회사 이사라는 손님을 수소문했지만 이미 행적을 감춘 뒤였다. 김 씨는 그렇게 자신과 아버지의 전 재산 3억 원을 모두 날렸다.
김 씨는 차마 이러한 사실을 집에 알릴 수 없었다. 김 씨는 자신이 모아둔 돈을 집에 조금씩 송금하고 ‘투자한 원금에서 나온 이자’라고 말하면서 시간을 벌었다. 김 씨는 당장의 의심은 피했지만 점점 자신의 수입만으로 집에 보내는 돈을 감당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김 씨는 이때부터 각종 동호회에 가입했다. 자신이 당했던 수법 그대로 써먹을 ‘범행대상’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평범했던 식당 아르바이트생이었던 김 씨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한탕’으로 손해를 만회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 찼다. 2011년부터 김 씨는 볼링 동호회, 배드민턴 동호회, 인터넷 자동차 동호회 등 주로 남성회원이 모인 동호회 위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과거 자신을 속였던 손님과 마찬가지로 직업부터 외모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재력가로 포장했다. 김 씨는 동호회 모임이 있을 때면 외제차를 몰고 나가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성에게 접근할 때면 자신은 부산의 한 무역회사 과장이고, 아버지는 운수업체 사장이며 어머니는 대형식당 3곳을 운영한다며 재력을 과시했다. 그렇게 김 씨는 동호회를 통해 만난 남성 중 4명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김 씨는 볼링동호회에서 만난 남성 A 씨(33)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자 골프 클럽 등 고가의 선물을 하며 환심을 샀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 씨와 A 씨는 결혼얘기까지 오가는 깊은 사이가 됐다. 어느 날 김 씨는 결혼을 약속한 A 씨에게 “집을 나와 경제적으로 독립한 모습을 보여줘야 부모님이 결혼을 허락해 줄 것”이라고 말하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A 씨는 돈 얘기를 꺼내며 1년 치 생활비를 요구하는 김 씨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김 씨의 배경이 괜찮았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헌신적이었기에 A 씨는 1억 9000만 원 상당을 대출받아 김 씨에게 건넸다. 김 씨는 A 씨에게 빌린 돈의 이자를 매달 A 씨의 계좌로 입금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았다.
김 씨는 이렇게 연인관계로 발전한 B 씨에게 미래를 약속했다. B 씨는 자신의 부모와 인사까지 하며 살갑게 대하는 김 씨에게 1억 8000만 원 상당의 돈을 빌려줬다. 김 씨는 부산에 거주하는 C 씨에게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 돈이 필요하다”며 마수를 뻗쳤다. C 씨는 김 씨에게 2억 5000만 원 상당을 빌려줬고 김 씨가 곧 1억 원을 변제하는 등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 ‘채무관계가 끝나면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김 씨와 ‘친한 누나·동생’으로 지내던 D 씨도 자신에게 한없이 친절한 김 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2500만 원 상당의 돈을 선뜻 빌려줬다.
울산 울주경찰서 경제팀 차경민 수사관은 “김 씨는 ‘꽃뱀’과는 이미지가 먼 평범한 인상의 여성이었다”며 “대신 김 씨는 피해자 남성들을 잘 챙겨주고 내조를 잘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여기에 골프채와 해외여행 등 고가의 선물을 하면서 피해자들의 환심을 산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동시에 4명의 남자를 만나면서 이들에게 빌린 돈으로 이자를 돌려막기도 하고 원금을 조금씩 갚기도 하면서 의심을 피했다. 하지만 점점 커지는 씀씀이와 허영심이 김 씨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의 생활비와 쇼핑비로 많은 카드빚을 졌고, 만나는 남성들에게 ‘통 큰 선물’을 하다 보니 갚아야 할 돈의 규모가 점점 늘어난 것이다. 결국 돌려막기로는 빚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김 씨는 모든 피해 남성들과의 인연을 끊고 돌연 잠적했다.
김 씨가 잠적한 후 피해 남성들은 김 씨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됐다. 김 씨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피해자들은 경찰에 김 씨를 고소했다. 잠적했던 김 씨는 지난 6월 21일 울산의 한 오피스텔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울주경찰서 차경민 수사관은 “김 씨는 얼마 전까지도 집에 돈을 보내줬기 때문에 김 씨의 집에서는 최근에서야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김 씨의 계좌에는 1000만 원가량 남아있는 것이 전부였다”며 “김 씨는 별다른 사기전과도 없었다. 참고인 조사를 토대로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파악 중이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