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세력이 실눈 뜨고 노려본다
▲ 지난해 5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재판 장면. | ||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은 헌재의 높아진 위상에 따라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높아지고 감시도 엄정해지면서 헌재 구성원들이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지난주 <중앙일보>가 성인 국민 1천6백여 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헌재는 영향력 면에서 청와대(11위)·검찰(7위)·국정원(16위)·경찰(8위) 등 핵심 국가기관은 물론, 열린우리당(19위)·한나라당(14위) 등 여야 정당, 전경련(9위)·참여연대(12위)·민주노총(21위) 등 주요 사회단체들을 모두 제치고 3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헌재는 신뢰도 면에서도 이들 기관들을 압도하는 4위로 조사됐다.
헌재보다 영향력이나 신뢰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파워조직은 삼성·현대차 등 대기업들뿐이었다. 특히 최고법원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대법원(영향력 5위, 신뢰도 6위)보다도 높은 순위가 나와 헌재의 분위기는 더욱 고양됐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과 신행정수도이전 특별법 위헌 결정 등이 얼마나 우리 국민들에게 헌재의 위상을 높여주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됐다.
국가의 최고법인 헌법을 다루는 최고법원임에도 1988년 창설 이후 ‘국민들이 무게감을 못 느끼는 기관’으로 위축돼 있던 헌재가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셈이어서 헌재 구성원의 자부심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탄핵심판 결정 이후 윤영철 헌재소장이 기자들에게 “헌재가 창립 이후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위상을 제대로 각인시켰다”고 한 자평이 ‘허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던 셈이다.
▲ 이상경 재판관 | ||
부동산 임대소득을 축소 신고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관행이긴 하지만 법질서 수호에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할 헌법재판관의 탈세는 헌재의 도덕성에 치명타가 아닐 수 없다. 특히 탈세과정에서 이 재판관측이 임차인에게 월 4백만원대의 임대료를 1백만원대로 낮춰 신고해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까지 폭로되면서 조세범 처벌법상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냐는 논란까지 일 정도였다.
언론에서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하자 이 재판관은 사실을 인정하며 곤혹스러워했고 헌재는 파문이 확산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칫 최근 급등한 헌재의 위상을 총체적으로 흔드는 대형 악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곧바로 이 재판관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헌재 관계자는 “이 재판관이 솔직히 사실을 털어놓은 상황에서 변명은 통할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사안 자체가 국민들 사이에 흔히 있는 일이어서 파문이 가라앉기만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직 헌법재판관에 대한 비위 논란은 지난 2월에도 제기된 적이 있다. 당시 고위공직자들의 재산변동 결과가 발표되면서 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김영일 헌법재판관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김 재판관이 개발지역에 속한 농지를 매입해 되판 뒤 다시 개발 붐이 일고 있는 땅을 사면서 수억원의 차익을 남겼다는 의혹이었다.
실제 김 재판관은 2000년 2월 부인 명의로 매입한 경기 성남 분당의 논(1천3백89㎡·시가 6억2천4백여만원)이 지난해 1월 토지공사에 수용되자 경기 용인의 밭(1천1백50㎡·시가 7억6천5백여만원)을 다시 부인 명의로 산 것으로 나타났다. 김 재판관은 분당의 논을 파는 과정에서만 3억원 정도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헌재측은 “김 재판관의 주거지가 논 근처여서 매입에 법적인 문제는 없었고 실제 논을 밭으로 형질 변경해 주말 등에 직접 농작물을 경작했다”고 해명했지만 부동산 투기로 오해받을 여지가 매우 큰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석 달 사이에 잇따라 헌법재판관의 비리 의혹이 폭로된 것은 헌재 창설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대법관은 물론 헌재재판관도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성역’으로 통하며 개인적 비판은 거의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들어 이 성역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문제는 진보성향의 새로운 집권세력이 ‘보수의 아성’으로 불리는 대법원과 헌재를 탐탁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법원과 헌재 스스로도 국가보안법 관련 판결, 대통령 탄핵심판 등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판결이나 결정을 내리면서 더 이상 성역 안에만 머물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성역’에 대한 도전은 지난해 헌재가 정부의 신행정수도 건설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급격히 표출됐다. 당시 여권에서는 헌재의 결정을 강경 비판하며 “보수적인 헌재를 물갈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일각에서는 현재 헌재소장과 국회 추천의 일부 헌법재판관(3명)에 대해서만 실시하는 인사청문회를 나머지 헌법재판관 모두로 확대 실시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자는 구체적인 주장도 제기됐다.
헌재에 대한 비판은 여권뿐만 아니라 개혁성향의 시민단체나 언론 등에서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헌재 관계자는 “헌재는 위헌심판이 제기된 법률 등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법리적으로 검토하는 헌법이 부여한 책무를 다할 뿐”이라며 “보수니, 진보니 하는 정치적 잣대로 평가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헌법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 함의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헌재의 결정은 계속 사회적 비판의 도마에 오를 수밖에 없고 헌재재판관들에 대한 혹독한 사회적 감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헌재가 이 같은 사회적 검증과정을 제대로 통과해야만 진정으로 중요한 국가기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