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조 대잇기 ‘왕권다툼’ 재현?
▲ 전주이씨 종친회인 대동종약원이 대한제국 황실의 적통이라고 발표한 이원씨가 지난 23일 황세손 고 이구씨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하지만 종친회 일부 회원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원씨는 적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동종약원이 사리사욕에 빠져 5백 년의 조선 황실을 더럽히고 있다”는 비난도 쏟아졌다. 한켠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면 황실에 피바람이 불 것”이라며 마치 조선시대 궁궐안을 보는 듯한 섬뜩한 말도 튀어나왔다.
조선 왕조가 막을 내린 지 약 한 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 왜 이렇게 ‘황실의 적통자’를 제대로 가리기 위한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걸까. 왜 그들은 ‘마지막 황태자’를 반드시 계승시키고자 하는걸까. 아직도 ‘황실 복원’은 살아 꿈틀대고 있는 까닭이다. 조심스럽게 ‘입헌군주제’ 용어마저 등장하고 있다. “통일 이후 대한민국은 입헌군주제로 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는 지금 미래 ‘황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인 셈이다.
지난 22일 창덕궁 낙선재.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은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회의 끝에 황세손 이구의 뒤를 이을 다음 적통자로 이원씨를 결정했다. 그는 고종황제의 증손자로, 뉴욕대를 졸업한 뒤 현재 현대홈쇼핑 홍보실에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별세한 황세손 이구씨의 경우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종친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사손(후사를 이을 양자)’ 제도를 건의했고 이것이 결의되어 그간 다양한 양자 후보자들을 만나왔다는 것이다.
결국 황세손이 숨지기 1주일 전에 문서로 후계자에 대한 승인을 했고, 이에 따라 종친회는 이원씨를 다음 후계자로 임명한 것이다. 일견 합리적이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적통자가 임명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황실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격렬한 반발의 기운이 싹트고 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종친은 “황실 후계 문제는 정통성을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밀실에서 자기들끼리 결정하고 있다”며 “폭력을 쓰지는 않겠지만 집단적인 반발이 있을 것이며 이를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황실의 가장 웃어른으로 인정받는 이해경 여사(의친왕 5녀)는 “법적 소송을 통해서라도 제대로 된 황실의 적통을 세우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황실 계보에 있는 한 인사는 “자기네들끼리 정하라고 하라”며 노골적인 냉소를 보냈다. 심지어 후계자를 놓고 회의를 하는 동안에 한 종친은 회의장에 대고 “이런 식으로 후계를 정하는 것이 아니다. 황실에 피바람이 불지 않게 하라”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동종약원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갑씨의 아들 이원씨를 적통자로 정했을까. 이를 따지려면 고종 황제의 가족계보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종의 세 아들 중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따라서 다음 계승자는 당연히 첫째 동생 의친왕이 되어야 했으나, 일제는 말 잘듣는 둘째 동생 영친왕을 후계자로 밀었다. 영친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어려서 일찍 죽고, 사실상의 장남인 이구가 적통을 이은 셈이다. 그런데 이구도 후사가 없이 별세한 탓에 순종에 이어 영친왕마저 후대가 완전히 끊겼다.
따라서 의친왕의 아들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이는 10남에서부터 13남에 이르는 4명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연장자는 10남 이갑씨인데, 그가 현재 곧 일흔을 바라보는 고령인 관계로 그의 장남을 후계자로 정했다는 것이 대동종약원의 논리인 셈이다.
여기에 반발하는 측에서는 “9남 이종씨의 장남 이혜원씨(국립고궁박물관 자문위원)가 엄연히 국내에서 활동하는데 그를 제쳐둔 것은 무슨 이유냐”고 따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란이 이어진다. 즉 고종 황제의 실질적 차남인 의친왕의 후손에 대한 논란이 그것.
일부에서는 의친왕의 아들은 13명이 아닌 12명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대동종약원의 공식적인 입장은 13남이지만 12남을 주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이번에 적통 후계자로 정해진 이원씨의 부친 이갑씨다. 그는 현재 알려진 족보에서는 의친왕의 10남이지만 그 스스로는 언제나 ‘9남 이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논란이 있는 것일까.
이는 ‘가짜 족보’ 때문이라고 한다. 한 황실 관계자는 “옛날 황실에는 아예 족보 자체가 없었으며, 이것이 근대에 들어와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논란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문제가 되는 인물은 의친왕의 9남이라고 알려진 이종씨로 그가 의친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 분명하다면 그의 장남인 이혜원씨가 거론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종씨의 아들 혜원씨는 현재 성씨가 이(李)씨가 아닌 전(全)씨다. 그가 전씨인 까닭은 당시 일제 시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종씨가 아들의 이름을 바꿨다는 것. 해방 이후 다시 성씨의 복원을 법원에 청구했지만 묵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호적상 이름은 ‘전혜원’으로 남아 있다.
일부 종친들은 “비록 호적상 성은 ‘전’씨로 분류되지만 ‘혈통’으로만 따지자면 분명 혜원씨가 이번 황실의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번 대동종약원의 적통 결정은 이런 논란을 피해간 것으로 보인다.
반발은 더 있다. 의친왕의 적통은 차남인 이우씨인 만큼 황세손 후사 역시 이우씨의 아들이 이어야 맞다는 주장이 그것. 항일 의지가 강했던 의친왕은 13명의 아들 중 일본으로 귀화한 장남 이건씨는 사실상 아들로 치지도 않았다는 것. 그보다는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한 차남 이우씨를 끔찍이 아꼈고, 따라서 실제 이우씨가 장남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종친에서는 의친왕의 실질적 장남 이우씨의 후손이 가장 합당한 적통자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주장으로 대두되는 인물이 바로 이우씨의 장남인 이청씨다. 하지만 현재 미국 시카코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청씨는 사태의 전면에 나서고 있지 않다.
▲ 고 이구씨의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 낙선재에 들고 나는 문상객들. | ||
또 한 명의 미스터리 속 인물이 있다. 바로 이청씨의 이복동생인 이초남씨다. 만약 이청씨가 적통을 계승하지 못한다면 다음 승계는 이초남씨에게로 넘어간다. 하지만 현재 대동종약원은 그의 존재 자체를 백안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초남씨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스스로 황실의 적통임을 자신하고 나선 바 있다. 물론 종친회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애초 이초남씨의 모친인 유정순씨는 고종 황제가 직접 배필을 정해준 손자며느리 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되어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우씨는 박주선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우씨의 정부인은 박씨가 되고 유씨는 후실이 되는 모양새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이초남씨는 자신의 생모가 실제 고종의 점지를 받은 손자며느리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기자는 장례식장에서 이초남씨를 직접 만날 수 있었지만 그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굳건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는 “지금은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다음에 이야기하자”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는 전혀 다르게 의친왕의 11남인 이석씨를 적통계승자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한때 그는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이기도 하며 언론에도 자주 등장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인 탓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 종친회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존재를 껄끄러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석씨는 정식 당호를 받지 못해 적통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얘기를 공공연히 흘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 질린 탓인지 이석씨 스스로도 기자에게 “나는 적통자가 아니다”라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었다.
적통 계승 싸움 행태에 대해 환멸을 표시하는 이들은 의외로 굉장히 많았다. 종친인 이강문씨(효령대군 18대손)는 “이번 적통계승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들과 새롭게 대동종약원을 장악하려는 세력들의 피튀기는 음모가 있다”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황실의 올바른 운영을 요구하는 ‘우리황실사랑회’ 역시 “대동종약원은 그 태생부터가 의심되는 집단이며 친일의 대가로 얻어진 기득권 유지에만 힘쓰고 있다”며 “대동종약원은 이구 황손을 ‘명예총재’로 내세워 온갖 지원금을 타내고 ‘얼굴’을 내세우는데 급급한 집단”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어쨌든 현재 대동종약원에서는 공식적인 후계자를 임명한 상태고 이에 반발하는 세력들이 ‘집단행동’을 암시하고 있는 한, 당분간 ‘적통 논란’은 복잡하게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이남훈 프리랜서 freehoo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