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등 떠밀다 ‘유임’에 머쓱
▲ 지난 7월28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승재 신임 해양경찰청장에게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이 인사가 경찰 수뇌부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체가 유력시됐던 이 해양청장의 유임 배경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경찰 내에서는 해양청장이 치안정감에서 치안총감으로 한 단계 격상된 만큼 이 청장이 물러나고 같은 급인 최광식 경찰청 차장이 승진, 임명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인사가 발표된 지난 7월28일 오전까지도 최 차장에게 승진 축하전화가 올 정도로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찰청 한 인사는 “인사 뚜껑이 열리기 직전까지 최 차장의 해양청장 임명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며 “경찰 정보에도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만큼 이번 인사는 경찰에게 상당한 ‘충격파’를 전해주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번 이 청장 유임을 의외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권 한 인사는 “해양청장을 승격시키기로 결정한 다음 이 청장 교체를 기정사실화하고 후임인사를 찾았고, 최 차장을 가장 유력한 카드로 생각했다”며 “갑작스런 인사 선회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번 인사는 노무현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관측이 정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며 연말까지 그냥 가자는 뜻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이 그런 뜻을 인사수석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에 따라 해양경찰청과 함께 차관으로 승격한 기상청장, 통계청장도 교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연말에 대대적인 후속인사를 예고하는 대목으로 읽힌다. 이에 따라 허준영 경찰청장의 거취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허 청장은 열린우리당은 물론 한나라당 등 정치권으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아오고 있다. 대구 출신인 허 청장은 3선 연임 규정에 묶여 내년 5월 지방선거 출마가 불가능한 이의근 경북지사의 대타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찰에서는 허 청장이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경찰청장을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경찰의 숙원 사업인 검찰과의 수사권 조정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면 허 청장은 청장으로서의 역할은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그럴 경우 허 청장은 새로운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올 연말 허준영 경찰청장은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 ||
경찰의 다른 인사는 “허 청장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문제는 어떤 정당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에서 경찰청장을 지낸 만큼 열린우리당으로 가야 하는데, 그럴 경우 한나라당 텃밭인 경북에서 당선이 어렵고, 반대로 한나라당으로 갈 경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방증하듯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는 허 청장 영입을 위한 물밑 교섭이 활발하다는 지적이다.
열린우리당 한 관계자는 “허 청장은 열린우리당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TK(대구·경북)에서 확실한 필승카드”라며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한나라당 역시 “허 청장은 우리 사람”이라며 ‘허 청장 지키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문제는 해양경찰청장 인사로 야기된 경찰 수뇌부 인사 논란이 차기 경찰청장 후보 간의 치열한 기 싸움으로 확산될 징후가 벌써부터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법에는 치안총감인 경찰청장은 치안정감에서 승진하도록 돼 있다. 이에 따라 경찰청장 후보는 치안정감인 이기묵 서울경찰청장, 이택순 경기지방경찰청장, 강영규 경찰대학장, 최광식 경찰청 차장 등 4명이다.
이들 중 최 차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해양경찰청 후임이 논의될 때 한사코 거부했다. 차관급이라고 해도 해양청장으로 갈 경우 경찰청장은 이미 깨진 꿈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해양청장은 경찰청장 경쟁에서 밀려나도 갈 수 있는 자리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경찰청장은 서울청장이 승진해 가는 경우가 많아 이 서울청장은 유력 후보로 꼽힌다. 충남 보령 출신으로 홍성고와 중앙대를 졸업한 이 청장은 76년 간부후보생(24기)로 입문해 서울 서초서장, 경찰청 공보관, 충남청장, 경찰청 정보국장 등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영남과 호남 간의 지역 경쟁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충청 출신이라는 점도 장점으로 작용해 경찰 2인자라는 서울청장까지 승승장구한 것이다. 하지만 정권에 대한 ‘로얄티’ 또는 ‘지역 안배’라는 정치적 요소가 많이 좌우하는 경찰청장으로 가기에는 지금까지의 지역적 배려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택순 경기청장은 서울 출신으로 용산고와 서울대 문리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18회)를 패스한 뒤 경찰에 특채된 케이스다. 서울 종로서장과 경남지방청장, 청와대 치안비서관 등 핵심보직을 두루 역임했다. 업무 추진이나 대인관계도 무난하다는 평이다. 특히 이해찬 총리와는 고교 동문이다. 이 총리 취임 이후 정·관계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용산고 동문들이 상당히 뛰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남 합천 출신의 강영규 경찰대학장은 경찰 간부들의 최대 학맥인 동국대 경찰학과를 나왔다. 남대문 경찰서장과 서울청 경비단장, 경찰청 경비국장 등을 지내 야전사령관으로 통한다. 허 청장과 같은 PK 출신이라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최광식 경찰청 차장은 경찰청장보다는 서울청장을 노린다는 관측이다. 이번 해양청장 무산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특수수사팀인 ‘사직동 팀장’을 지내면서 ‘옷로비 사건’을 담당해 세간을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사직동 팀장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능력만큼 빛을 보지 못한다는 평도 있다.
경찰 한 관계자는 “해양청장 인사가 경찰 내 세력싸움에 불을 당긴 격이 됐다”며 “경찰이 지역, 학연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수면 아래에선 각 세력 간에 치열한 견제와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영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