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원은 ‘삼성의 안기부’?
▲ 옛 안기부 도청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이 지난 19일 저녁 국가정보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친 뒤 차량을 타고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정작 국내기업의 도청 방어는 원론적인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엑스파일이 공개된 뒤 도감청 방어 서비스를 해주는 업체에 기업들의 문의전화가 밀려드는 등 아직까지는 사후약방문 수준이라는 것.
이는 이번 엑스파일로 타격을 입은 삼성그룹도 마찬가지다. 보안의식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진 삼성그룹이 이번 엑스파일에서 도청의 주된 타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청장소도 삼성그룹의 사업장인 호텔신라가 포함돼 있었다.
삼성은 지난 2000년 이후에야 도감청 문제에 본격 대응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0년에 국내 도청 분야 권위자를 초빙해 삼성 사장단에게 도청 방어 기술 현황과 필요성에 대해 강연을 하고 삼성 본관의 이건희 회장 집무실 등 개인적인 공간은 물론 삼성전자 수원연구동 같은 건물에 외부 도청은 물론, 전자파도 철저하게 차단되는 시설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 작업은 도감청 방지를 위한 시설과 전자파 차단, 수맥 차단 등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이건희 회장도 작업현장에 나와 지켜보는 등 각별한 관심을 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00년이라는 시점은 삼성이 엑스파일을 확보한 인물들로부터 처음 공격을 받은 직후라는 점에서 삼성이 어느 국내 기업보다도 ‘도청 방어’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후 보안 업무를 다루는 계열사인 에스원에 통신보안팀을 만들고 독일 마북테크닉으로부터 기술 협력을 받는 등 이 분야에서 상당한 진척을 이루고 있다.
에스원의 ‘특수사업’이 2001년 3월 구조본 인사팀장이던 이우희 사장이 에스원 사장으로 온 뒤 본격화됐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에스원에선 그룹 내 주요임원에 대해 정기적으로 도감청 탐지활동을 벌인다. ‘기업비밀 보안’을 위해서라지만 이에 대해 상당한 중압감을 호소하는 임원도 있다. 안으로부터든, 밖으로부터든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의 인척인 이우희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에스원을 “고도의 정보시스템회사”라고 불렀다. 재계에서는 에스원을 ‘삼성의 안기부’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삼성으로선 그나마 다른 기업들보다 앞서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인 셈이다.
에스원에선 기술 이전을 받은 뒤 그룹 요인들의 차량이나 중국 일본 등 외국에 있는 삼성의 주요 사업장에도 이런 도감청 방어시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엑스파일 사건을 국내 보안산업의 범위를 한 단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한 셈이다.
국내 도청방어 기술의 권위자인 EMC네트워크의 김문환 고문은 “국내 기업들의 경우 몇몇 그룹을 빼고는 아직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외국의 경우 특급호텔 같은 곳의 VIP룸에는 도감청이 전혀 불가능한 도감청 방어실(실드룸 shield room)을 운영하는데 국내에선 그런 곳이 없다는 것이다. 실드룸은 실내의 전기선이나 전화선, 환기구, 유리창, 벽, 출입구 등에 모두 도감청 방어장치를 해 미리 준비한 전화선 등을 빼고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전자파도, 내부에서 나가는 전자파도 철저하게 차단함으로써 도감청 및 외부전자파 공격이 불가능하게 만든 안전지대를 말한다. 이런 실드룸은 특수연구소 등에는 진작부터 설치돼 있었다.
국내에도 이런 실드룸이 정부 보안관련기관에 설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보안사항이다. 삼성 등 일부 기업에서 제한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일부 정부 부처에서 유리창에 도감청 방어시설을 한 정도다.
한때 북한 요인의 남한 방문설이 나돌 때 일부 국내 호텔에서 실드룸 설치에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설치되지는 않았다. 또 미국 대통령 등 미국쪽 요인이 방한할 때 숙소로 자주 이용되는 하얏트호텔이나 북한 대표단이 우리나라를 찾을 때 자주 묵는 워커힐호텔에도 실드룸은 없다.
기업들의 대응이 아직까지는 소극적인 데 반해 일반인들의 도감청 방어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건희 회장의 자택과 집무실에 도감청 방어시설을 하는 것을 본 삼성의 사장급 경영인 중 일부가 개인적으로 자신의 집에도 도감청 방어시설을 하고 있다는 것.
개인 사무실이나 주택에 도감청 방어시설을 하는 경우 전자파 차단 공사도 함께 시행된다. 성격상 도감청 방어와 전자파 차단이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감청 방어 공사는 4m×5m의 정도의 공간에 적용하는 시공비가 1천5백만원쯤 든다. 때문에 아직은 주로 사장급 경영인 등이 도감청 방어에 대해 적극 나서고 있다. 분당 파크뷰나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등 펜트하우스급 아파트 거주자들이 개별적으로 요청하고 있다는 것. 특히 파크뷰는 인근의 성남 비행장으로 인해 전자파에 노출될 위험이 커서 거주자들이 전자파 차단에 민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감청 방어는 특수 도료나 섬유, 유리에 붙이는 전자파 차단 필름 등으로 이뤄진다. 유리창에 전자파 차단 필름을 붙이는 이유는 외부에서 유리창에 레이저를 발사해 실내 진동을 감지해 도청을 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자파 차단 필름은 바로 이런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것.
최근 다국적기업인 3M에서 이런 제품을 내놓았다. 가격은 ㎡당 20만원 정도. 하지만 이 제품은 외부 도청은 어느 정도 막아주지만 휴대전화나 내부에서 중계기를 이용한 도청 방어에는 별 효과가 없다.
EMC네트워크의 김 고문은 “회의 석상에서 누군가 휴대전화를 켜놓고 있고 외부에서 증폭기를 이용하면 완벽하게 도청할 수 있다”며 내부자에 의한 기업비밀 유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전자파도 문제지만 내부에서 나가는 전자파도 막는 실드룸이 실질적인 기업비밀 보안에는 효과적이다.
실드룸은 금속을 이용한 조립형 캐빈 형태가 많이 쓰였지만 최근에는 특수도료와 특수처리한 섬유 등을 이용해 기존의 사무실을 실드룸으로 바꾸는 방법이 최근에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실드룸을 만드는 특수도료나 섬유 등은 최근 국산화가 이뤄졌다.
실드룸 조성에 이용되는 특수도료나 특수섬유는 전자파 차단 효과가 있다. 때문에 전자파가 작업능률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절감한 기업들이 전자파 차단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전자파 밀도가 높은 강남역 인근에 있던 H화장품 회사는 창문에 외부 전자파 차단 장치를 한 후 매출이 3배가 늘었다고 한다.
EMC네트워크의 김 고문은 전자파 차단과 관련해 시급한 일 중 하나가 초중고등학교 전산실의 전자파 차단이라고 밝혔다. 전산실 아래쪽으로 각종 전선이 무더기로 지나가는데 이것이 아이들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이다.
도감청이나 전자파는 진작부터 있었던 문제다. 엑스파일은 이런 문제에 대한 대처를 사업화하는 촉매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