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회복 칼끝’ 이건희 노린다
▲ 지난 95년 11월 이건희 회장이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출두하고 있다. 그후 삼성그룹 내에선 “총수가 검찰청에 들어가는 치욕을 두 번 다시 겪어선 안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자리잡았다고 한다. | ||
서울의 한 소장파 검사의 울분에 찬 목소리다. 그는 기자의 검찰과 삼성의 유착설에 대한 질문에 대뜸 언성부터 높였다. 한 일선 검사의 의견에 불과하지만 최근 검찰의 분위기를 상당부분 대변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확실히 최근 검찰의 분위기는 달라졌다. “국민적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삼성을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일선 수사관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검찰의 삼성에 대한 반감은 ‘삼성의 특수부 출신 검사들 대규모 영입’, ‘도청 X파일로 불거진 고위 검찰에 대한 삼성 로비설’ 등이 불을 지폈다. 최근 정치권의 삼성 때리기에 이어 지난 4일 법원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증여는 불법’ 판결이 기름을 끼얹었다.
삼성의 고민은 이런 여론의 급격한 ‘반삼성’ 분위기에 있다. 삼성측은 “검찰은 여론의 힘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사납게 칼을 휘두르기 때문에 아주 걱정”이라고 긴장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 3차장 박한철 검사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 의혹 수사에 대해 ‘땅굴파기’ 공사와 비유해 관심을 끌었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땅굴 공사를 재개하는 만큼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말로 수사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검찰이 스스로 누워 침 뱉는 격”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땅굴파기는 검찰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지적이다.
당초 이번 수사는 지난 2000년 6월 대학교수 43명이 공동으로 삼성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비롯됐다. 삼성에버랜드가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과정에서 시가로 최소한 5만원 이상 평가되는 주식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에게 7천7백원이라는 저가에 매각했다며 이 회장과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 등을 배임 혐의로 고발한 것.
하지만 당시 고발장을 접한 검찰의 태도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주 소극적이었다. 검찰이 실제 수사를 시작한 것도 고발한 지 3년이 지난 2003년부터였다. 그것도 공소시효 때문에 할 수 없이 억지로 하는 인상이 짙었다. 96년 말 벌어진 이 행위에 대한 배임죄를 적용할 경우, 공소시효는 7년이면 끝나기 때문. 따라서 2003년 12월 이전에 수사를 마무리짓지 않으면 검찰은 고소 고발건을 제대로 수사조차 하지 않고 공소시효를 넘겼다는 엄청난 비난 여론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03년 연말과 2004년 연초 삼성은 당시 최악의 상태를 맞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에서는 국민의 지지 여론을 등에 업고 서슬 퍼런 기세로 2002년 대선 불법자금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을까. 당초 삼성에버랜드 고발건에 대해 미적지근했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역시 갈수록 강경한 입장으로 변하더니 급기야 2003년 12월 이 회장과 재용씨의 소환조사가 불가피하다는 방침을 밝히기에 이르러 삼성측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검찰과 국내 최대 재벌 삼성의 긴장 관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95년 노태우 대통령의 비자금사건 수사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여론의 기세는 전직 대통령까지 구속시킬 판이었기 때문에 이 회장으로서도 버틸 도리가 없었다.
그는 95년 11월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이것이 ‘삼성가’ 황제 이 회장의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검찰 출두였다. 당시 그는 굴지의 재벌 회장이라는 신분을 의식해서인지 상당히 어색해하고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는 그해 12월 검찰에 의해 뇌물공여죄로 불구속 기소됐고, 재판정에 서야 했다. 당시 최후진술에서 이 회장은 “내가 꼭 여기에 서 있어야 하는지 검사님이 원망스럽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당시 유죄확정판결을 받았지만 집행유예로 구치소에 수감되는 최악의 상황만은 면했다. 이때부터 삼성그룹 내에서는 “총수가 검찰청에 들어가는 치욕을 두 번 다시 겪어선 안 된다”는 것이 마치 불문율처럼 자리잡았다고 한다.
삼성이 이후 회사 내 법무팀 인원을 대대적으로 강화하고 나선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현재 구조조정본부 산하에 있는 법무팀은 대검수사기획관을 지낸 이종왕 사장을 중심으로 판·검사 출신 변호사만 약 15명가량이 포진해 있고 1백여 명 이상의 변호사를 보유하고 있다. 당시 재계 주변에서는 거물급인 이 변호사의 영입에 대해 삼성에버랜드 사건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유력했다. 그만큼 삼성으로서는 그룹의 사활이 걸린 사건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이 회장에 대한 위기는 98년 다시 찾아왔다.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동원해서 불법 대선자금을 모은 이른바 세풍사건 수사였다. 당시 검찰은 이 회장의 배임 횡령 혐의에 대한 증거자료를 일부 확보하고도 이를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대기업과 정치권의 악연은 5년 단위로 재벌 회장들을 어김없이 긴장 속에 몰아넣었다. 2002년 대선 직후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는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강도가 달랐다. 여론의 힘을 등에 업은 검찰은 “이참에 권력의 시녀 오명에서 벗어 나겠다”며 무척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안대희 중수부장이라고 하는 검찰 스타를 낳기도 했다. 하지만 대표적 원칙론자인 안 전 부장도 삼성에 대해서는 끝까지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이 회장이 불법 자금 전달에 개입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자금 또한 회장의 개인 자산이라는 삼성측의 주장을 반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사실상 삼성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히 그는 지난해 2월 그룹 회장들의 소환 조사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삼성은 자수 자복 기업이 아니냐”는 말을 반사적으로 내던진 적이 있다. 극히 짧은 말이었지만 사실상 당시 검찰의 뜻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삼성은 검찰 수사에 협조적이었으니 재벌 총수의 소환 조사는 하지 않을 방침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당시 수사 실무진에서는 “삼성이 채권번호도 알려주지 않을 만큼 수사에 너무 비협조적이어서 전 수사진들이 사채시장을 일일이 다 뒤졌다”고 고충을 토로하고 있었기에 안 전 부장의 이 발언은 기자들을 의아스럽게 만들었다.
‘경제난’ 여론에 기대어 태풍을 피해갔던 ‘삼성호’는 이후 순항을 거듭하던 중 난데없이 전혀 예상치 못한 도청 X파일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당초 검찰은 “도청 자체가 불법”이라며 독수독과 이론(독이 든 나무에는 독이 있는 열매가 열린다는 뜻으로 위법적으로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내세워 수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기류가 급격히 변하는 모습이다. 소장파를 중심으로 “괜히 삼성 때문에 꼬리를 내리는 듯한 모양새로 오해받을 일이 뭐가 있느냐”는 불만이 제기됐고, 때맞춰 정치권에서 “삼성의 돈이 검찰 고위 간부에게 전해졌다”는 내용이 폭로되면서 “검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삼성과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는 분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실제 대검 내 일부 소장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연구관들은 독수독과 이론에 대한 연구를 통해 수사 명분을 찾는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