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대한 기자회견 을 하고 있는 정대철 대표(왼쪽)와 김원기 고문.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당내 위상 등을 감안할 때 김 고문의 향후 행보는 당 개혁안 확정을 앞두고 본격화되고 있는 차기 당권 구도의 최대 변수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김 고문이 어떤 결심을 하느냐에 따라 당개혁과 당권을 둘러싼 신주류 내부 갈등이 일대 ‘혈전’으로 확산될 수 있어 청와대를 포함한 정치권 전체가 김 고문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주 민주당 신주류 핵심 관계자 13명이 조찬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신주류의 양 거두인 김원기 고문과 정대철 대표가 차기 당권 문제를 둘러싸고 가시 돋힌 설전을 벌였다.
이날 모임에서 김 고문이 “나는 당의장이고 원내대표고 모두 관심없다. 자를 사람은 자르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자 정 대표는 “그런데 형님은 왜 비주류 의원들을 그룹으로 만나고 다니냐”며 따지듯 말했다. 김 고문은 신주류 좌장이라는 자신의 위상을 의식, 일단 웃고 넘어갔다.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신주류의 한 핵심 관계자는 “김 고문과 정 대표 간에 틈이 자꾸 넓어지고 있다”며 “정 대표는 김 고문이 결국 자신을 밀어내고 당권을 잡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정 대표는 김 고문이 임시지도부를 구성한 뒤 당원과 대의원 등 당의 하부조직을 신주류측 인사로 교체,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노릴 것으로 보고 있다.
김 고문의 최근 일련의 행보를 되짚어 보면 정 대표의 의구심이 전혀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 고문은 지난 5일 당 개혁안에 강력 저항하고 있는 당 부위원장단을 만나 여러 가지 공약을 제시했다. 김 고문은 이날 당 개혁안이 통과되더라도 상설특위를 16개 두고 특위 산하에 부위원장제를 두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중앙위 조직을 대폭 축소하겠다는 당 개혁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김 고문은 또 당직자와 부위원장들에게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자격을 부여하겠다고 밝혔다. 이 역시 기존 당원과 대의원 구성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개혁안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 당 부위원장단은 수십 년간 민주당에 몸담았던 인사들로 7백여 명에 이르며 현재 대의원 자격을 갖고 있다. 이들이 대의원 자격을 유지할 경우 차기 전당대회에서 이들의 지지를 받는 당권 후보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신임이나 신주류 내에서의 위상 등을 감안하면 김 고문이 당권 도전에 나설 경우 정 대표는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 고문이 구주류로 분류되는 당 부위원장단의 지지까지 확보할 경우 승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최근 정 대표는 이상수 총장과 손을 잡고 ‘조기 전당대회론’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김 고문이 당권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을 때 신주류의 당권 도전 대표주자로서 자신 입지를 분명히 하는 동시에 대표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당권 경쟁에 나서겠다는 구상이다.
▲ 김원기 고문(왼쪽)과 노무현 대통령. | ||
더구나 일단 선대위가 구성되면 총장은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자금과 조직운영을 실무적으로 통괄한다. 따라서 공천과 정치자금을 집행하는 사무총장은 전통적으로 당내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는 최적의 자리다. 차차기 당권이나 원내대표를 노릴 위치에 있는 이 총장으로서는 이 같은 총장 프리미엄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의 당 개혁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사무총장은 처장으로 위상이 낮아지고 현역의원이 아닌 사무처 당료가 맡게 된다. 이 총장으로서는 자연히 당 개혁안의 일부 수정을 내심 기대할 수밖에 없고 이 점에서 당의장(현재의 당대표)을 노리는 정 대표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정 대표 역시 당 개혁안대로 공천권과 당론 결정권 등을 모두 빼앗긴 채 상징적 대표로 격하된 당의장을 맡을 생각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일단 조기 전당대회론을 관철시킨 이후에는 차기 총선 승리 등의 명분을 내세워 당 개혁안에 명시된 당대표 권한 축소 등 중앙당 슬림화 방안을 유예시키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 고문도 이 같은 정 대표와 이 총장의 의중을 훤히 꿰뚫고 있다. 사실 김 고문은 조기 전당대회에서든 임시지도부 구성 후 전당대회에서든 정 대표는 물론 당내 누구와도 경선할 의사가 없었다. 김 고문은 현재 민주당 내에서 자신의 위상이 정 대표보다 한 단계 앞서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 대표와 경쟁하는 것은 굳이 계단을 내려와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경쟁을 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는 것이 김 고문의 인식.
특히 당 개혁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당의장은 공천권과 당론 결정권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당권을 누릴 수 없는 ‘식물 대표’에 머무르게 된다. 당의장과 투톱을 이루는 원내 대표의 위상은 대폭 강화되지만 김 고문의 정치적 위상에는 다소 걸맞지 않은 자리다.
따라서 김 고문은 일단 당 개혁안을 원안대로 통과시키고 당의장 후보는 정 대표에게 넘겨주는 대신 임시지도부의 수장으로서 6개월간 당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당내에 구축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 대표측이 당 개혁안의 근간을 흔들어 당의장의 권한을 당대표 수준으로 유지하려 하면서 김 고문의 이 같은 구상에도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당대표의 권한이 유지되고 이 자리를 정 대표가 차지하면 김 고문의 위상과 영향력도 급격히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고문의 또 다른 고민은 노무현 대통령이 조각을 포함한 초기 국정 운영과정에서 김 고문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 김 고문은 노 대통령이 자신을 정치고문이자 정치후견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줄 것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단 한 차례도 김 고문과 공식적인 단독 면담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조각과 관련, 한 번도 직접 자문을 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신주류의 핵심 관계자는 “김 고문이 최근 수차례 노 대통령에게 섭섭한 감정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김 고문으로서도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당 내외 영향력을 급속히 잃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따라 신주류 내에서는 김 고문이 지난주 부위원장단 집단 면담을 계기로 당권 문제 등에 대해 방향 선회를 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일단 당 개혁안을 원안대로 밀어붙이는 데 최선을 다하되 당내 사정상 조기전당대회 개최와 당의장 권한 강화 요구가 수용될 가능성이 높을 경우 곧바로 정 대표와 정면 승부에 나선다는 것이다.
김 고문과 정 대표는 현재 신주류 내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어 양자의 대결은 곧 신주류의 양분과 혈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여기에 강경 개혁파의 신당 창당론까지 맞물릴 경우 분당사태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