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원혼이 비행기를 돌려 세웠나…
수지 김은 1952년 충주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6세 무렵 서울로 올라와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상당히 강인하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는 스물네 살에 혼자 홍콩으로 갔다. 그곳에서 홍콩인과 결혼해 홍콩이민국으로부터 독립클래스 신분증을 획득하고는 바로 이혼했다. 그녀는 그후 홍콩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다가 중국인을 만나 동거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남편과의 사이에 딸을 낳았으나 얼마 후 헤어지고 혼자 살게 됐다. 그녀는 그 무렵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살고 있던 아파트를 세놓으려고 내놓았다.
1958년생인 윤태식은 수지 김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1980년 방위병으로 제대한 그는 이일 저일 하다가 1986년경엔 서진통상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사장을 설득해서 홍콩에 있는 영화사로부터 영화판권을 추천받아 수입해 주고 그 수수료를 받기로 했다. 그는 서진통상 해외사업본부장이라는 이름으로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 역시 잡초처럼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홍콩에서 살 집을 구하고 있던 윤태식은 우연히 수지 김을 만나게 됐다. 그녀의 아파트 중 방 하나를 빌려 살게 됐다. 같이 살면서 윤태식과 수지 김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그해 9월부터는 아예 동거하게 됐고 그후 함께 한국으로 와서 10월 16일에는 혼인신고까지 했다.
윤태식은 홍콩의 중문대학교 어학연수과정 기초반에 등록했다. 어학코스에 등록을 하면 홍콩정부로부터 학생비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비디오사업을 하기 위해 ‘유나이티드모션픽쳐’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주소지는 그가 살고 있는 수지 김의 아파트로 정했다. 외환은행 홍콩지점에 계좌도 개설했다. 그해 말 그는 홍콩에 있는 한국센터빌딩에 비디오대여점을 개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이 즈음부터 두 사람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들이 사는 낙복아파트 9층 14호에 거주하는 중국인 짐칸콴씨는 한국말로 시끄럽게 싸우고 가구가 부딪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13층 1호에 사는 채씨나 9층 13호에 사는 가브리엘라도, 10층 13호에 사는 알프레도도 한국인 여자가 앙칼진 소리로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해 연말경 수지 김은 일본인 2명과 클럽 볼보에서 술을 마시다가 너무 취해 주정을 했다. 그날 밤 부부싸움 소리가 더 컸다. 다음날 오후 2시경 그 집에 일하러 간 필리핀가정부 유지나는 수지 김의 왼쪽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걸 보았다.
1987년 1월 2일 오후 4시경. 수지 김은 이웃 아파트에 사는 친구인 최현옥을 찾아갔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기 돈을 윤태식이 모두 가져갔다면서 20달러를 빌렸다. 수지 김은 친구와 함께 시장에 가서 콩나물, 오징어, 족발을 사가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오후 6시경이었다.
그녀는 저녁을 만들었다. 한 시간쯤 후 윤태식이 아파트로 돌아왔다. 잔뜩 화가 나 있는 얼굴이었다. 사흘 후에 비디오대여점을 열기로 했었는데 실내공사가 아직 그대로였다. 중국인 인테리어 업자는 한없이 느려 터졌다. 사흘 안에 인테리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수지 김은 윤태식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윤태식이 안 먹는다고 했다. 수지 김은 친구와 둘이서 이미 차려 놓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친구인 최현옥은 윤태식과 수지 김 사이의 분위기가 그날따라 더 이상한 걸 느꼈다. 둘 사이가 너무 냉랭했다. 그녀는 수지 김에게 넌지시 물었다.
“둘이 싸웠어?”
“….”
수지 김은 대답이 없었다. 그때 윤태식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윤태식이 전화를 끝내자 기다리던 수지 김이 그에게 말했다.
“짐 싸가지고 나갈 거야?”
“알면서 왜 그래?”
윤태식이 퉁명스럽게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 비꼬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자리가 불편했던 최현옥은 슬며시 빠져나와 침사추이거리의 자기 아파트로 돌아왔다. 저녁 7시 30분이었다. 그게 수지 김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수지 김은 죽었다.
다음날 오전 10시 30분경 윤태식은 ‘코리아 트래블 오피스’라는 여행사에 전화를 걸었다.
“뭘 도와드릴까요?”
전화를 받은 담당직원 김희정이 말했다.
“싱가포르행 편도 비행기표 중 가장 빠른 일등석표 있습니까?”
윤태식의 목소리가 다급하고 초조했다. 그는 북한으로 망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북한대사관으로 갈 생각이었다.
“저녁 9시 35분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805편이 가장 빠른 비행기인데요.”
“알았습니다. 제가 직접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날 12시 30분경 윤태식이 여행사를 찾아왔다.
“예약한 비행기표 가격이 얼마죠?”
“2천9백70달러예요.”
윤태식은 주머니에서 달러를 꺼내어 지급하고 황급히 비행기표를 받아갔다.
한 시간 후인 오후 1시 30분. 윤태식은 수지 김의 친구인 최현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지가 거기 갔어요?”
윤태식이 물었다.
“아니요. 어젯밤 헤어지고 만나지 못했는데요. 왜 그러세요? 어디 나갔어요?”
최현옥이 의아한 어조로 되물었다.
“어젯밤 현옥씨가 우리 집에서 떠난 후 일본인 한 명과 한국인 한 명이 찾아와서 수지와 서로 돈 문제를 얘기했어요. 인상들이 야쿠자 같던데. 수지가 저보고 나가서 담배를 좀 사다달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들이 얘기하는 걸 제가 듣는 게 좀 불편했나 봐요.”
수화기 너머로 윤태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담배를 사가지고 돌아와 보니까 아파트 문이 잠겨 있었어요.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응답이 없더라고요. 제가 가까운 가게에 갔다 오느라고 열쇠를 가지고 가지 않았죠. 그래서 현옥씨 집에도 갔었어요. 현옥씨도 없더군요. 다시 아파트로 가니까 현관에 열쇠가 떨어져 있어 집에 들어가 보니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좀 이상해서 수지의 여권을 찾아보니까 없어졌어요. 연락이 오면 알려줘요. 아무래도 이상해요.”
“알았어요. 어디 갔을까?”
최현옥이 대답했다.
“참! 수지가 없으니까 필리핀 가정부한테서 열쇠는 달라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어야겠네요.”
윤태식이 수지 김의 친구 최현옥에게 그렇게 덧붙였다.
그날 오후 3시. 홍콩의 어스틴가 8번지 2층 아파트 방에서 필리핀인 유지나는 친구 로사리오와 함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유지나가 파출부로 일을 가는 집 중의 하나가 수지 김이라는 한국인 아파트였다. 그때 벨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수지 김의 남편인 미스터 윤이었다. 젊고 미남이었다.
“아파트 안에 열쇠를 두고 나와 들어갈 수가 없는데 열쇠 가지고 있죠?”
미스터 윤은 약간 초조한 얼굴이었다.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유지나는 안으로 들어가 열쇠를 가져다주었다.
“우리 아파트에 언제 청소하러 올 거죠?”
그가 물었다.
“오후 6시요.”
“그러면 내가 열쇠를 받아 가라고 전화할 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요.”
“알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이 열쇠 하나밖에 없죠?”
윤태식은 유지나가 혹시 다른 열쇠를 가지고 있나 확인했다.
“그거 하나뿐이에요.”
유지나의 대답이었다. 윤태식이 돌아갔다. 유지나가 우연히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30분이었다.
이날 오후 8시. 윤태식은 싱가포르행 UA805편에 탑승했다. 이제 이륙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이륙 스타트라인 근처로 가고 있었다. 이제 곧 제트엔진이 강하게 동체를 밀어내면서 비행기는 밤하늘로 치솟아 오를 것이다. 그러면 끝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륙허가를 대기중이라고 흔히 방송하곤 했다.
“승객여러분! 기체 결함으로 이 비행기는 다시 회항하겠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는 깜짝 놀랐다.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비행기는 다시 게이트 쪽으로 가고 있었다. 무조건 어디 다른 곳이라도 가는 비행기를 타고 싶었다. 그러나 한밤중 홍콩을 떠나는 비행기는 없었다. 항공사 직원은 모든 탑승객에게 미라마 호텔의 쿠폰을 나누어 주었다. 그걸 보자 그는 소스라쳤다. 죽은 수지의 아파트 바로 옆 킴버얼리가에 있는 호텔이었다. 밤을 하얗게 새웠다. 다음날인 1월 4일 오전 9시 30분 그는 홍콩하늘을 벗어나고 있었다. 악몽 같은 지난밤이었다.
1월 5일 오전. 윤태식은 싱가포르의 북한대사관에 찾아갔다. 일등서기관이라는 사람을 만나 망명하겠다고 했다. 북한측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의심하는 눈치였다.
북한대사관에서 나온 그는 미국대사관을 찾아갔다. 거기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은 그를 한국 안전기획부 파견관에게 넘겼다. 영화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 납치된 게 떠올랐다. 다급해진 그는 북한에 납치될 뻔했다고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수지 김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다고 꾸며댔다. 북한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