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 쥐고 잡으러 갔다가 시신으로 만나 ‘날벼락!’
첫째날
7월 22일 유병언 전 회장의 시신을 최초 발견한 박 씨가 변사체가 있던 곳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모습. 박 씨는 “사체를 누군가 이곳으로 옮겨 놨을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별장 정문 입구엔 노란색 테이프로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다. 그런데 현관 문 앞을 쳐다보다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분홍색 줄을 가진 잠금장치 위로 끝이 조금 깨진 식칼이 위에서 아래로 반듯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6월 초까지만 해도 없던 칼이었다. 음산한 분위기가 엄습해 왔다. 폴리스 라인을 넘어 옆을 돌아가니 왼쪽 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문을 열어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서 잠시 더 앞마당에서 별장을 바라보고 서 있으려니 아래 밭에서 “거 누구요”, “남의 집 앞에서 뭐하는 거요”라는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인은 곧이어 별장 앞까지 올라왔다.
자신을 구원파라고 밝힌 이 노인은 유 전 회장의 도피를 돕다 구속된 변 씨 부부의 염소를 돌봐 준다고 했다. 송치재휴게소 내 식당 ‘송치골가든’은 같이 일하는 사람이 현재 운영을 도맡아하고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다시 밭으로, 우리는 송치재휴게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 11시쯤 ‘송치골가든’에 들어가 점심으로 ‘멧돼지전골’을 주문했다. 20분쯤 지났을까. 현재 이 식당을 운영하며 해당 건물 2층에서 기거하는 구원파 신도 A 씨(여)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멧돼지전골을 먹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이 없어지고 젓가락질이 느려졌다. 귀에 익은 구원파 신도들의 이름들이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순천 별장에 또 왔냐고요? 그러면 와서 모셔가세요.” 대화를 이어 가던 A 씨의 목소리가 흥분된 어조를 띠기 시작했다. 통화는 약 20분 동안 이어졌다. A 씨와 함께 식당 일을 하는 B 씨(여), 별장에서 만난 노인 C 씨, C 씨와 함께 염소 돌보는 일을 하는 D 씨 네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밖으로 나왔다. 옆의 송치재휴게소에서 음료수를 사 먹으며 점심이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통화 상대는 인천지방검찰청 특별수사팀 소속 수사관이었다. A 씨는 “수사관이 ‘(유 전 회장) 순천 어디에 있죠? 별장에 다시 안 왔어요?’라고 물어 봤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자꾸 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A 씨에게 유 전 회장이 차명으로 매입한 것으로 알려진 부동산의 위치를 알아냈다. ‘아이조아’라는 청소년수련원이라고 했다. 내비게이션에 찍으니 나오지 않았다. 대략적인 위치를 바탕으로 도보로 길을 나섰다. 뙤약볕이 내리 쬐고 있었고 습기가 많아서 한증막 같은 날씨였다. 도로의 중앙분리대를 몇 차례 뛰어 넘고 이쪽저쪽 산을 오르내렸지만 ‘아이조아’는 찾을 수 없었다.
유 전 회장이 장기 은신 목적으로 차명 매입한 순천 월등면 소재 제2별장. 과거 ‘아이조아’라는 청소년수련원으로 쓰였던 이곳은 내비게이션에도 안나오는 외딴곳에 위치해 있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전화로 다시 물어봤으나 설명해 준 길을 통해 문제의 부동산을 만날 수는 없었다. 갈팡질팡 길을 헤매다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 순천교회(야망수련원)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맞닥뜨린 회색 자가용 안에는 5명의 아줌마들이 타고 있었다. “유병언 잡으러 왔어요”라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뒤쪽까지 둘러보고 나오려니 교회 입구에서 새까맣게 선팅한 차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우리가 주차된 우리 차를 향해 걸어가자 그 차는 곧 교회를 떠나 뒤쪽의 산길로 사라져갔다.
우리는 조금 더 헤매고 돌아다녔다. 결국 찾다 못해 염치를 무릅쓰고 안내를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친절했다. 자신들도 마침 염소 사육에 필요한 무언가를 구하러 근처를 가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라고 했다. 두 명의 구원파 신도들이 탄 트럭은 군데군데 흙과 작은 돌멩이들이 깔리고 도로가의 휘어진 나뭇잎들이 차도의 절반 가까이를 점령한 산간도로를 따라 2km가량을 올라갔다. 구원파 순천교회(야망수련원) 앞에서 좌회전을 했다. 이정표가 그곳이 ‘월등면’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차창으로 고개를 돌려 “여기서부터는 차로는 움직이기 힘드니 걸어가야 해요”라고 말하며 트럭을 타고 그곳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또 걸었다. 15분쯤 걸어 도착한 곳에 집이 한 채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푸른 나무들밖에 없었다. 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마당 주변의 미처 치우지 못한 짐들 가운데서 ‘조심조심 천천히 내려갑니다 ~아이조아~’라는 글자가 적힌 파란색 테두리의 팻말을 통해 그곳이 과거 수련원으로 쓰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이런 곳에 어떤 단체에서 수련을 올까 싶을 만큼 외진 곳에 있었다. 마음먹고 은신한다면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창고와 집 내부를 구석구석 둘러보고 나니 시계는 오후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떠나 전 순천시의회 의장인 박 아무개 씨를 만나러 순천 조례동으로 향했다.
박 전 의원을 통해 월등면의 최근 매입 부동산 외에도 순천 송치재 인근에 꽤 넓은 면적의 구원파 소유 부동산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순천과 여수에서 큰 호텔을 갖고 있다는 구원파 재력가에 대한 얘기들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자 오후 6시가 거의 다 돼 가고 있었다.
꽤 길게 느껴졌던 하루였다. 수확도 있었다. 다음날의 본격 취재를 위해 숙소로 향했다. 그렇게 차분하게 하루가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갑자기 유병언의 사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둘째 날
쉽게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였다. 다음날 유 전 회장을 어떻게 쫓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포상금 5억 원을 어떻게 쓸 것인지 달콤한 상상도 했다. 일단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렇게 새벽 1시. 갑자기 후배 기자로부터 문자 하나가 왔다. “유병언 사체 발견, 뭐죠?!!”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유병언 추정 사체 발견’이라는 기사가 하나둘씩 뜨기 시작했다. 유병언을 잡으러 왔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동안 수많았던 유병언과 관련한 오보들이 스쳐지나갔다. “아,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는 찰나, “순천장례식장에 사체 보관”이라는 문구가 스쳤다. 잠옷을 내팽개치고 뻗친 머리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숙소에서 장례식장까지는 차로 10여분. 장례식장에는 이미 지역 언론사 및 중앙 언론사의 순천 주재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때부터 기자들의 ‘장례식장 정보모임’이 시작됐다. 사체 발견 순간부터 상태, 장소, 사망 시나리오까지 갖가지 정보가 오고갔다. “사체의 목과 몸통이 분리돼 있었다”라는 전언은 이때 흘러나왔다. 순천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말한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사체를 수습한 사람이 구원파다”, “키가 150cm에 아직 성별이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확인되지 않은 전언도 떠돌았다.
처음에는 여러 정황상 ‘유병언이 아니다’라는 목소리가 더 높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정보가 조합되자 ‘사체가 유병언일 가능성이 높다’라는 쪽으로 합의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아니면 자연사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편이 갈렸다.
우형호 전 순천경찰서장 역시 순천장례식장에서 사체를 보고 새벽 2시에 장례식장을 떠났다. 당시 마주친 우 전 서장의 표정은 근심이 가득했다. “손가락, 뼈 골절 확인했어요?”(유병언은 오른손 중지가 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병언 맞아요?”라고 날카롭게 들어오는 질문에 우 전 서장은 “서울에서 2차 정밀감식을 해야 한다”는 답변을 하고는 서둘러 빠져나갔다. 이후 검사가 영장을 갖고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 3시 27분, 사체가 대기 중이던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출발한 시각은 3시 52분이었다. 흰색 천에 덮인 유 전 회장의 사체는 너무나 왜소해보였다.
긴박했던 장례식장에서의 새벽 시간이 흐르고 오전 8시부터는 순천경찰서가 기자들로 바글바글했다. 오전 9시에 ‘유병언 사체 발견’과 관련한 브리핑이 있었기 때문. 순천장례식장과 현장에서 새벽 내내 잠을 설쳤던 터라 눈이 퀭한 기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앞서의 우 전 순천경찰서장이 3층 브리핑룸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브리핑에서 우 전 서장은 장례식장에서와는 다르게 확신에 찬 어조로 “DNA감정과 지문 감식 결과 유병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브리핑이 끝나고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주목할 만한 점은 경찰 스스로 경찰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스쿠알렌, 고가 의류품 등 유류품이 있었는데 유병언인 줄 몰랐느냐”는 질문에 우 전 서장은 “잘못을 시인한다. 초동수사가 완벽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답해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너무 솔직했던 탓일까. 브리핑 후 우 전 서장이 경질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자 우리는 송치재휴게소의 ‘송치골가든’으로 향했다.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 방문이다. 구원파 신도가 운영하는 이 음식점이 취재진에게는 단골 음식점이 됐다. 반찬을 나르던 한 구원파 여신도가 “정말 유 회장님 맞아요?”라고 물어본다. “지문이 맞으니 아마 맞을 거 같은데요”라고 답하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무래도 믿기는 어렵다는 표정이다. 밥을 먹기 시작할 무렵 방금 질문을 던진 구원파 신도가 잘 익은 파전을 내왔다. “기자님들이 가서 진실 좀 밝혀주소.” 그 신도는 정말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전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식당을 운영하는 A 씨는 별장 문 앞에 꽂혀 있는 칼에 대해 “어제 오후에 경찰에서 와서 ‘별장에 누가 칼을 꽂았냐?’ ‘구원파가 꽂아 놨냐?’고 물으며 ‘거기 근처만 가도 다 구속당하니까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가 꽂아 놓은 것 아니고 누가 꽂았는지 언제부터 꽂혀 있었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식사를 하고 유 전 회장의 사체가 발견된 매실 밭으로 향했다. 송치재 휴게소에서 2.5km 떨어진 부근이다. 매실 밭은 차로에서 그리 많이 떨어지진 않았다. 다만, 그렇게 쉽게 눈에 띄는 장소도 아니었다. 매실 밭으로 가는 입구로 들어서면 집이 한 채 보이고 그 뒤편에 밭이 펼쳐져 있다. 해당 땅에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최초 발견자이자 신고자인 박윤석 씨(77)의 이름이 확인됐다. 최소한 유 전 회장이 사망한 곳은 구원파 소유의 땅은 아닌 셈이다.
취재진이 접촉한 박 씨는 전형적인 시골 농부의 인상이었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박 씨는 5분마다 한 번씩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까지 일일이 받고 있었다. 사체가 발견된 곳을 손으로 가리켜 보라는 사진기자들의 주문도 받아줬다. 느릿느릿 얘기하다가도 사체를 발견한 당시 상황을 회상할 때는 흥분된 어조가 나왔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부렀당께. 살점도 거의 없었어.” 박 씨는 “술은 다른 데서 먹고 오고 사체는 누군가 여기 옮겨 놨을거여”라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최초 발견자로서 나름의 확신을 갖는 듯했다.
현장을 떠나 다시 순천경찰서로 향했다. 형사과장을 만나 현재 수사 진행 상황을 물어보기 위해서다. 형사과장실에서 직접 만난 윤재상 전 형사과장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기자는 유 전 회장의 ‘마지막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운전기사 양회정 씨 등 측근들에 대한 수사를 물어봤다. 윤 전 과장은 “향후 수사에 집중할 부분”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윤 전 과장의 형사과장으로서의 모습도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면담 이후 당일 날 바로 직위해제됐기 때문. <일요신문> 취재진은 그 다음날 경찰서 담장을 걸어가는 윤 전 과장의 쓸쓸한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셋째 날
7월 23일 유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숲속의 추억’에 폴리스 라인이 겹겹이 처져 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경찰이 이 별장을 압수수색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인근 부동산을 찾아볼 심산으로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마침 도로 건너편 이발소에서 하얗고 네모진 이발용 가운을 입은 이발사 아저씨가 플라스틱 파란 발을 걷어 내고 잠시 밖을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다가갔다. 예상대로 이 씨를 알고 있었다.
저전동에서 월등면으로 이사를 떠난 지는 꽤 됐다고 했다. 월등의 땅을 팔았다고 했더니, 이 씨의 부인이 전남 무안의 한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그곳 관사에 살아서 거기로 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씨도 오랫동안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몇 년 전에 퇴임 했다고 했다. “아마 (이 씨가) 땅을 팔았다면 저기서 중개했을 거야”라며 길 건너편의 부동산을 오른쪽 검지를 죽 펴 가리켰다. 부동산으로 들어갔다.
갈색 선글라스로 멋을 낸 초로의 부동산 중개사는 “3~4년 전에 이사를 갔다. 월등 땅을 팔 때는 중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락처를 알 수 있냐는 말에 두꺼운 가죽 표지의 노트를 펼치더니 일일이 손가락을 짚어가며 확인 작업을 했다. 5분여간의 아날로그적 검색 작업 끝에 이 아무개 씨의 전화번호가 나왔다. 이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전남 무안에 있었다.
이 씨는 40여 분에 걸쳐 매우 소상히 당시 상황을 풀어 나갔다. “지금부터는 성모 마리아상 앞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을 것입니다”라는 음성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억울함이 상당히 쌓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조는 시종일관 차분하고 일관됐다. “느긋하던 정 씨가 5월 22일 이후부터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와 급히 집을 비우라고 다그쳤다”는 이 씨의 발언을 통해 유 전 회장이 그곳을 숲속의 추억을 이을 ‘제2의 별장’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니 정오가 돼 있었다. “운전 조심히 하고 가세요”라는 부동산 할아버지의 정감 어린 인사를 뒤로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의 목적지는 당연히(?) ‘송치골가든’이었다. 이날은 타사 기자도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A 씨는 “밤에도 서치라이트를 하도 비춰 대서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했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고 식당을 나왔다. 식당 앞으로는 여러 언론사 차량들이 수시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숲속의 추억’에 다시 가 봤다.
식칼은 여전히 꽂혀 있었다. 몇몇 기자들이 폴리스라인 안쪽으로 들어가 별장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도 들어가 별장 옆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별장 후문으로 연결된 산길을 몇 분간 따라 올라가 봤다. 유 전 회장의 도피 경로로 의심되는 길이었다. 한 언론사는 이곳 주변 상공으로 헬리캠을 띄우고 있었다.
우리는 월등면의 유 전 회장 최후 매입 부동산으로 또 갔다. 굵은 자갈과 잡풀들이 무성했다. 몇 차례 차체에서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우리는 이 곳 부동산의 창고와, 집 주변으로 빙 둘러져 있는 쓰레기가 돼 버린 짐들을 집중 수색했다. 혹시나 모를 유 전 회장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뚜렷한 목표물도 있었다. 경찰의 주요 수색 대상인 유 전 회장의 안경이었다. 그러던 중 창고 선반 위에서 까만 안경집을 하나 발견했다. 안경집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열었다. 하지만 밝은 색 뿔테 안경이었다. 알도 작고 옆으로 퍼진 안경이었다. 유 전 회장의 안경이라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안경이었다.
순천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새로 바뀐 곽 아무개 형사과장을 만나기 위해서 형사과장실 문을 열었으나 잠겨 있었다. ‘회의중’이었다. 본청에서 감찰이 내려온 상태였다. 이날 순천경찰서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3층 대회의실 ‘팔마마루’에서는 최삼동 순천경찰서장으로 추정되는 마이크 목소리가 문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우리 서에 본청에서 7명이나 감찰이 내려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신임 서장으로서 직원들에게 던지는 사기 진작용 언사인 듯했다.
우리는 오후 5시께 사체를 최초 수습한 순천시 장천동 순천장례식장 이명수 대표를 만나러 갔다. 이 대표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직후였다. 이 대표로부터 사체 수습 당시 상황과 지문 채취 과정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6월 12일은 이슬비가 오는 날이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왔지만 그렇게 많은 구더기를 본 적은 없다. 매실 밭에서 구더기를 상당부분 걷어 내고 왔는데도 구더기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가슴 부위와 다리 부위에 약간의 살점이 있었고 머리카락도 뒤로 다 젖혀져 있었다. 유 전 회장 가족이라도 그 사체가 유 전 회장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니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숙소가 아닌 ‘숲속의 추억’으로 다시 운전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압수수색이 실시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어제와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수십 대의 취재차량들이 국도변 한 쪽 차선을 물고 길게 주차를 해 놓고 있었다. 입구에는 다홍색 고무 재질의 폴리스 라인이 겹겹이 X자 모양으로 처져 있었고 ‘출입금지 순천경찰서장’이라는 팻말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폴리스 라인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몸을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 속의 밤은 유독 깜깜했고 대신에 별은 무수히 많았다.
최 서장을 비롯한 순천경찰서 직원들이 별장으로 왔다. 압수수색 계획을 설명하고 풀기자단에 압수수색 후 현장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풀기자단 수를 놓고 최 서장과 기자들 사이, 기자들과 기자들 사이에 약간의 언쟁이 있은 후에 12명으로 최종 풀단이 구성됐다. 풀기자단이 별장 내부 2층의 통나무 벽 내부 은신 공간과 유류품 등을 둘러보고 나온 후 나머지 기자들이 삼삼오오 풀기자단에 붙어 질문공세를 벌였다. 이렇게 지난했던 하루가 또 마무리돼 갔다.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