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 사이선 ‘액면가 축소법’ 전수
권은희 후보의 재산 축소 신고 논란을 계기로 공직선거 후보자 또는 공직자의 재산공개시 비상장회사의 주식 가치가 액면 가치가 아닌 실제 가치가 반영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일요신문 DB
권은희 후보의 재산신고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권 후보는 경찰공무원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재산을 신고했지만, 그때는 공직자윤리회의 소명이나 제재를 받은 적이 없다. 지난 21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한 김용희 중앙선관위 사무차장 역시 권 후보의 재산신고에 관해 “불법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반응도 만만찮다. 권 후보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역시 고액 자문료를 받은 것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정치적인 책임을 졌다”라고 언급한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지냈던 김병국 고려대 교수의 경우 시가로 1000억 원대 빌딩을 소유한 부동산 임대업체 주식을 50% 갖고 있었으나, 재산공개 때 건물 시세가 아닌 법인의 주식 액면가 6억 원만 신고해서 큰 논란을 빚기도 했다.
특히 권은희 후보는 남편 소유의 부동산 임대업체 케이이비앤파트너스 소유의 오피스텔 두 군데 중 한 군데에서 최근까지 실제 거주했고, 또 다른 한 곳은 남편이 개인 주소지로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권 후보는 해당 법인과 별도의 임대차 계약을 맺거나, 전·월세를 낸 적은 없어 사실상 개인 재산이 아니냐는 의혹이 여전히 남는다.
실제 법인을 설립한 뒤 본인 소유의 유·무형 자산을 운용하는 방식은 정치권에서는 흔히 사용된다. 비상장회사의 경우 그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통일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점에서 액면가로 신고하게끔 된 현행법을 악용해 자신의 재산 규모를 축소·은폐하기도 한다. 고위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액면가 축소법’이라는 단어와 절차가 대대로 전수될 정도다.
현 제19대 국회에서도 어렵지 않게 의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19대 국회의원 중 최고 부동산 자산가로 알려진 박덕흠 새누리당 의원은 본인이 대표이사였던 건설업체 원화코퍼레이션 8만 9472주(지분율 49.5%)를 비롯해 용일토건·파워개발·원하티앤알비·원하종합건설·행복을만드는·혜영건설 등의 비상장회사 지분을 가족들과 함께 나눠 소유하고 있다. 권 후보 사례와 같이 해당 비상장사의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 가치를 재산신고에 반영한다면 박 의원의 실제 재산 규모는 더 커질 수 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부인 이 아무개 씨의 경우 제이티메론(1만 9500주, 39.0%), 리쿠퍼테크(11만 4000주, 15.2%), 레전드 인터내셔날(4750주, 47.5%) 등 보석류 가공 및 유통 회사 지분을 상당 부분 소유하고 있지만 재산신고 때 비상장회사 액면가 총액인 7600만 원으로 기재했다. 현역 의원들이 본인 소유의 다이아몬드 반지 등도 빠짐없이 신고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액면가가 아닌, 실제 회사가 보유 중인 보석의 가치를 따져야 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새정치연합에서도 권 후보를 비호하려는 목적에서 새누리당을 상대로 역공에 나서기도 했다. 7·30 경기 김포 보궐 선거에 출마한 김두관 새정치연합 후보 측은 지난 21일 상대편인 홍철호 새누리당 후보에 대해 “홍 후보가 2013년 100% 지분을 가진 크레치코로부터 15억 원을 배당금으로 받았다”며 “회사 자본금(13억 원)이나 직원 급여총액(12억 6000만 원)보다도 많은 15억 원씩이나 배당 받는 회사의 가치가 13억 원밖에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지적했다.
김영록 새정치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 22일 “새누리당 윤상현 사무총장 배우자도 두 개 법인의 비상장주식 69억 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며 “새누리당 계산이라면 총 1400억 원 이상 신고해야 한다”고 반격했다. 윤 사무총장의 부인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 신준호 푸르밀 회장의 딸인 신경아 씨다.
이 같은 정치권의 공방은 권은희 후보로 인해 촉발됐지만 바탕에는 느슨한 공직자윤리법이나 구멍 뚫린 국회법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개정하려는 현역 의원들은 ‘동료 의원을 대상으로 한 내부 총질’이라는 누명과 눈총을 받기 십상이다. 지난해 개정돼 올해 2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회법은 당초 ‘국회의원 겸직 금지’가 주요 목적이었지만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공익 목적의 명예직’을 예외 조항으로 두고 퇴로를 열어줬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동산 임대업의 경우에는 본인이 직접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만 국회의장에게 별도로 신고하게끔 돼 있고 그 현황을 별도로 공표하고 있지 않아 실효성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일요신문>이 확인한 결과, 19대 국회에서 부동산 임대와 같은 영리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고 신고한 의원은 모두 14명. 이 중 2명은 국회 윤리위원회로부터 부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22일 김재연 통합진보당 의원은 고위공직자 재산신고 시 비상장주식 평가방식을 기존 액면가에서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 평가방식을 준용하도록 하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이른바 ‘권은희법’을 대표발의하기도 했다.
김재연 의원 측은 “현행 국회법이나 윤리법의 경우 권은희 후보와 같이 본인이 아닌 배우자가 임대업을 하고 있다면 별도 신고하지 않더라도 괜찮아 개정을 통한 개선이 필요하다”며 “가령 부동산 과다 법인이라면 탁상감정에 따른 금액을 기재하거나 기준시가에 따른 자산가액을 제시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