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꿰어 맞추는 일은 그래도 나을지 모르겠다. 거기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생길 테니.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의혹과 의심의 창이다. 늘 끼고 있는 의혹과 의심의 안경 때문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만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를 가두는 감옥이고,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오염원 아닌가.
그나저나 어처구니가 없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허무하게 죽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을 벌어도 만져보기 힘든 돈을 가방 가득 넣어가지고 다녔으면서도 저렇게 완벽하게 초라하고 외롭고 기막힌 죽음이라니. 생전에 그가 누렸을 부귀영화가 덧없고 덧없다.
여든한 살이 된 우리 이모부는 지금 10개월째 병상에 누워 꼼짝하지 못한다. 가슴 아래는 거의 죽었는데, 정신이 온전하고 밥도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이모부를 통해 배웠다. 이제는 병원에서도 포기한 그를 이모가 옆에서 부양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완벽하게 불행한 풍경이다. 스스로 운동은커녕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남편을, 좋아지리라는 희망 하나 없이 돌봐야 하는 늙은 아내. 그러나 이모네를 다녀온 날에 엄마는 항상 은혜를 받고 온 신자 같았다.
그날은 점심상이 국수였단다. 국수를 비빈 이모는 이모부에게 국수를 권했는데, 이모부가 나는 지금 배가 고프지 않으니 나중에 먹겠다고 했단다. 비빔국수로 점심을 먹고 한나절 수다를 떨다가 다시 저녁때가 되었다. 이모부에게 저녁을 권하니 이모부가 이렇게 말했단다.
“어이들 먹어, 난 낮에 국수를 배부르게 먹어서 아직 배가 든든해.”
엄마는 해머로 맞은 것 같다고 했다. 어렸을 때 자기 엄마가 제삿날 했던 말이 생각이 나서. 엄마, 죽은 사람이 뭘 어떻게 먹는다고 제사상을 그렇게 열심히 차려? 그러자 외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단다. 사람은 먹어야 배가 부르지만, 혼백은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러. 그래서 예쁘게 차려야 하는 거야.
이미 한 발은 저승길에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 진실에 민감하다고 하면서 자기 언니가 진짜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엄마. 이모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이모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그런 소리 말아. 그래서 옆에서 말동무라도 되니 난 없는 것보다 좋아.”
그런 이모 곁에서 이모부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난 당신이 귀찮아하면 바로 가.”
가진 것 없어도 도란도란 나누고 사는 사람들의 미지막이 아름답다, 참 아름답다. 진짜 부자는 수십억의 돈 가방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이 살아있는 사람, 감동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절로 생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