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선택한 박철민·김규리에 경의를…
현실에선 실존 인물인 고 황유미 씨의 얘기지만 영화는 허구의 인물인 한윤미의 이야기다. 속초에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한상구(박철민 분)는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는 평범한 아버지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대학에 보내주지 못한 큰딸이 대기업 진성전자에 취업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 열심히 돈 벌어 아빠의 택시를 새 차로 바꿔주고 남동생을 대학에 보내겠다는 윤미. 그렇지만 윤미는 입사 2년도 채 안돼 백혈병에 걸려 돌아온다. 그리고 힘겹게 병마와 싸우던 윤미는 사망한다. 자신이 모는 택시 안에서 숨진 윤미의 손을 잡고 상구는 다짐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을 알려달라는 윤미의 부탁을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아빠가 꼭 약속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시작된 상구는 고인이 된 딸 윤미가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소송을 걸고 절대적으로 불리한 법정 공방에 돌입한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의 결정적 한계는 스포일러다. 이미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 결말까지 알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많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한윤미(박희정 분)가 결국 사망한다는 것, 그리고 한윤미는 1심 재판에서 승소해 산업재해를 인정받게 된다는 스포일러가 공개돼 있다.
영화평을 시작하며 스포일러부터 밝히는 것은 매우 옳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영화 속 한윤미의 실존인물인 고 황유미 씨를 보도하는 기사를 접했을 것이다. 또한 잘 모르던 이들 역시 영화 <또 하나의 약속> 개봉 즈음 각종 논란과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고 황유미 씨를 비롯한 희귀병이 발병한 반도체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려주는 데 더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스포일러는 그만큼 중요하다.
다만 이미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팩트를 이야기로 구성한 영화로 재확인하는 과정은 너무나 힘겹다. 기자가 개인적으로 보기 힘든 영화였다고 고백한 까닭 역시 여기에 있다. 특히 초반 5분, 한윤미가 최고의 대기업 진성전자에 입사하게 돼 온가족이 모여서 기뻐하는 장면은 바라보기 힘겹다. 효녀이자 좋은 누나인 윤미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회사에 입사하게 돼 모두가 축하하는 모습이 너무나 행복한 가족의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미 입사 이후 윤미가 겪게 될 희귀병과 사망, 그리고 가족들이 받을 상처를 다 알고 보기 때문에 이 가족의 모습은 진심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마지막 1분은 한윤미가 아닌 실존인물 고 황유미 씨와 그의 부친 황상기 씨의 얘기가 실제 그들의 사진과 자막으로 그려진다. 또한 시민단체 반올림에 제보된 비슷한 상황의 노동자들 얘기, 그리고 진행 중인 소송 얘기 등이 다시 이야기가 아닌 팩트로, 영화가 아닌 기사의 형태로 그려진다. 다시 우리는 영화 속 허구의 인물 한윤미를 보내고 현실 속 고 황유미 씨와 대면하게 된다.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에게 경의와 찬사를 보낸다. 특히 영화의 중심이 돼 흔들림 없이 이야기를 끌어 간 박철민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낸다. 대표적인 신스틸러인 박철민은 평범한 소시민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며 시민운동에 앞장서게 되는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냈다. 유명 배우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박철민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가 왜 이 영화를 선택했으며 얼마나 진심을 다해 한상구 역할에 다가갔는지 이해하리라.
또한 노무사 역할의 김규리를 비롯한 윤유선 김영재 이경영 정진영 박혁권 장소연 김선영 등 모든 배우들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좋은 영화로 완성될 수 있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