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강조…“자칫 우리 손목만 비틀라”
‘민생경제’를 내세운 여당이 재보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재계의 속내가 복잡해지고 있다. 새누리당사 상황실에서 여당 지도부가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기뻐하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재계는 일반적인 정치분석들처럼 이번 선거결과를 세월호 참사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경제활성화에 힘을 실으라는 주문으로 해석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이미 시중 여론의 저변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피로감이 누적돼 그 수렁에서 벗어나자는 마음의 준비가 돼 있었고, 이번 투표를 통해 표면화된 것으로 본다”면서 “다시 경기부양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된 게 다행”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선 특히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공’에 대한 평가가 많다. 부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한 달여간 부동산 규제완화, 재정확대, 금리인하 등 내수진작을 통한 경제활성화 방향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며 국면전환의 모멘텀을 만들었다는 게 주된 평가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난 3월까지 다소 나아지려던 경기회복의 기운이 세월호 참사로 완전히 바닥으로 추락했었는데, 최 부총리가 다시 제 궤도를 찾아가는 붐을 조성했다는 측면에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41조 원 규모의 재정확대와 더불어 가계소득 제고를 통한 소비여력 확충에 대한 메시지가 시장에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배당 확대 정책은 유가증권시장의 코스피지수 전망을 2100선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국회에 계류 중인 각종 법안들 처리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비롯해 국민 안전 법안, 국가 대혁신 관련 법안, 경제활성화 및 민생안정 법안 등이다. 제2기 경제팀이 추진한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완화 방침은 시행령 개정만으로 가능했지만 분양가 상한제 폐지, 의료서비스 영리화 등을 담은 서비스산업발전법, 숙박시설 입지 제한 완화를 내용으로 하는 관광진흥법 등이 대기 중이다.
우선 경제활성화 관련 법안들의 처리 전망이 그렇게 순조롭지 않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선거로 기존 147석인 새누리당은 158석으로 과반이 됐다. 새정치민주연합은 4석을 얻어 126석에서 130석이 됐다. 통합진보당은 5석, 정의당은 5석을 유지했다. 의석비율은 새누리당 52.7%, 새정치연합 43.3%, 진보당과 정의당 각각 1.7%다.
새누리당이 주도권을 쥘 수 있는 호조건이다.
하지만 이번 제19대 국회에서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회법(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중요 쟁점 법안에 대해서는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181석)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과반 의석도 상징성 이상의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야당이 선거패배의 후유증을 톡톡히 겪으면서 내홍 봉합에 골몰할 경우, 사실상 원내 대책은 일부 목소리가 큰 강경파들의 주도로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다. 안정된 정당구조가 아닐 경우 당론을 거치지 않은 돌출행동의 변수가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사실이다.
또 다른 경제단체 관계자는 “지난해 말 예산안 통과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당론이나 의원들의 집단여론이 아니라,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반대한 박영선 의원의 독단이었다”면서 “다수 의석의 힘으로 법안을 처리하려 할 경우 이에 반발하는 제2, 제3의 박영선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새누리당의 행보도 기업들의 심사를 마냥 편하게 해줄지는 미지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재보선의 슬로건을 ‘민생경제’로 정해 “원내 과반 의석이 절실하다”는 전략을 폈다. 그는 유세장마다 “재계가 절박한 심정으로 경기 회복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강조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한 입법활동을 벌이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의 내수활성화 방향과도 일맥상통한다. 최 부총리가 기업소득환류세제를 들고 나온 것도 기업보다는 가계에 우선순위를 뒀기 때문이다. 재계는 사내유보금이 단순 현금이 아니라 이미 여러 가지 고정자산에 투자된 자금이고, 가계 소득 증대나 내수 활성화 여부도 불투명하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는 강행할 태세다. 가계소득 중심의 정책방향이 기업으로선 ‘손목 비틀기’로 상충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야당이 제기해온 기업 관련 입법도 변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7월 여야 원내지도부와 만난 자리에서 야당이 제기한 상법 개정안에 대해 “챙겨보겠다”고 답했다. 이 개정안은 대주주의 독단과 전횡을 막기 위한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집중투표제 도입이 들어있다. 그동안 재계가 경영권 침해를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해온 법안이다.
재계는 다만 18개월 동안 정치 이벤트인 선거가 없다는 점에는 안도하는 분위기다. 6개월마다 재보선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20대 국회의원을 뽑는 2016년 4월 총선까지 전국단위 선거가 없기 때문이다. 초유의 ‘무 선거 시즌’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선거를 앞두고 나오는 갖가지 선심성 공약인데, 적어도 향후 1년 동안은 이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게 경기회복의 골든타임에 중요한 팩트”라고 말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