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없는 피해자 펄쩍 뛰는 피의자 ‘누가 맞나’
“청량리까지만 태워주실래요?”
그가 물었다. 구리시에 그의 집이 있는데 기사가 가기를 꺼리면 중간쯤에서 갈아타려는 생각이었다. 자가용 기사는 옆 조수석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1000원짜리 석 장을 손에 들었다. 그 요금을 주고 내릴 예정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술기운 탓에 그는 즉시 잠이 들었다.
“방향이 달라서 못 태워 드리겠어요. 내리시죠.”
어느새 기사가 조수석 문을 열고 그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비몽사몽간 그는 길가에 서서 다시 택시를 잡으려다가 뒤늦게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다. 그러나 흰 차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오십대 중반의 박경수 씨는 밤 10시 40분쯤 쁘렝땅백화점 앞에서 일산으로 갈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흰색 승용차가 소리 없이 다가와 앞에 섰다.
“어디 가요?”
자가용 기사가 물었다. 느린 어조에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박경수 씨는 탈 마음이 없었다. 그냥 가라고 손짓을 했다. 흰색 자가용이 사라졌다. 다시 10분쯤 흘렀다. 택시는 계속 오지 않았다. 그때 다시 그 흰색 자가용이 와서 앞에 섰다.
“일산 가는데 얼마면 돼요?”
그가 마음이 변해서 물었다.
“일반 택시요금이면 됩니다.”
흰색 자가용 기사가 말했다. 그가 차 뒷좌석에 들어가 앉았다. 일산을 가려면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술기운이 퍼지면서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일산 가서 길을 모르면 나를 깨워요.”
그는 곧 곯아떨어졌다. 잠시 후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차가 퇴계로 쪽의 으슥한 거리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붉은 나트륨등만 인적 없는 밤길을 비추고 있었다. 운전석에 아무도 없었다. 기사가 차 밖에서 문을 열고 자기를 부축해 끌어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얼떨결에 그가 기사의 손에 끌려 차에서 내렸다.
“왜 그래요? 안 가요?”
술 취한 그가 잠결에 물었다.
“일산 안 가요.”
기사가 다시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이상한 예감이 스쳤다. 순간 그의 손길이 무심히 호주머니로 갔다. 텅 비어 있었다. 지갑이 없어졌다.
“야, 도둑놈아!”
그가 버럭 소리치면서 운전석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운전석 문을 열려는 순간 기사가 차를 급발진시켰다. 타이어 마찰음이 날카롭게 나면서 그는 10m쯤 끌려가다가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얼굴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앞니가 부러지고 무릎을 다쳤다. 을지로 일대에서 그런 사고는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피해자들 거의 대부분이 술에 취해 있어 정체불명 기사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십대 말의 여자가 나의 법률사무실로 찾아왔다. 대학을 나온 후 동대문 근처에서 작은 옷가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강도상해범으로 체포됐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요. 아버지는 반찬값이라도 벌어보려고 틈만 나면 자식 차를 가지고 나가 영업을 하긴 하지만 강도를 하실 분은 아니에요. 손님을 태워도 조수석에 앉히지 뒷좌석에 앉히는 분은 절대 아니에요.”
그녀에게서 들은 아버지는 소문난 착실한 가장이었다. 당뇨로 고생하는 아내의 똥오줌까지 받아내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저한테 사건을 맡기러 오시게 됐죠?”
나는 항상 그렇게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변호했다.
“경찰서 유치장에 파견 나와 있는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이 구속영장을 즉석에서 빼보면서 자기 변호사가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계약금 1000만 원에 성공보수금 1000만 원을 먼저 내놓고 나중에 실패하면 반은 돌려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 변호사를 샀죠. 변호사가 유치장에 와서 아버지를 만났어요. 이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만나더니 가버렸어요. 이틀 후에 처음의 그 사무장이 오라고 해서 갔더니 돈을 돌려주더라고요.”
“왜 돈을 돌려줬죠?”
내가 물었다. 변호사 사회에서 힘들게 차지한 사건을 뱉어내는 건 대개 질이 아주 나쁜 사건이었다.
“판사하다 나와서 얼마 안 되는데 이런 지저분한 사건을 맡기 싫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다른 변호사 사무실로 갔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결국 어디서도 거절당하는 사건을 내가 맡게 됐다. 그런 사건의 경우는 예민한 관찰력이 필요했다. 그래야 이용당하지 않는다.
구치소에서 만난 오십대 말의 황기만 씨는 오각형의 얼굴에 쐐기 눈을 가진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가 펄펄 뛰면서 자기의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사업을 하다가 IMF 때 부도가 나서 할 수 없이 쉬게 됐습니다. 딸 둘 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나가고 있고 아들도 대학에서 학생회장을 하고 있어요. 가서 확인해 보세요. 제가 자가용 영업은 했지만 아직도 라이온스 클럽 회장입니다. 교회에서도 집사 직분을 맡고 있고요.”
그는 자신의 화려한 사회경력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 전과들은 뭡니까?”
내가 구해 가지고 온 그의 전과기록을 보이면서 물었다. 여러 종류의 전과가 있었다. 상습절도도 몇 번 있었다.
“절도 전과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10여 년 전에 형사들이 저를 잡아다가 경찰서 지하실에서 이불을 뒤집어 씌워놓고 몰매를 때려 자백을 받아낸 겁니다. 자백만 해주면 집행유예로 나가게 해줄 테니까 서로 좋게 해결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하지 않은 절도를 인정해 버렸더니 그 후부터는 사건만 있으면 나는 이렇게 절도범으로 지목되는 겁니다. 세상 서러워서 어디 살겠습니까? 경찰이 주장하는 범행한 날에 제가 어디 있었는지 우리 교회 목사님한테 한번 알아보세요. 제가 저녁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요.”
그가 살아온 여러 얘기를 하다가 불쑥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어려서부터 수없이 많이 경찰 조사를 받아본 사람입니다. 쉽게 당하지 않아요. 이 사건은 증거가 없을 겁니다. 자가용 영업을 해오면서 밤에 자기가 탄 차의 운전기사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저는 틀림없이 무죄예요. 경찰이 피해자로 만든 사람들 다 법정에 증인으로 불러서 저와 대질시켜 주세요. 저는 자신 있어요.”
어눌한 그의 어조와는 달리 프로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가 법정에서 완강히 범행을 부인하자 피해자들이 증인으로 나오게 됐다. 증인들은 모두들 자신 없고 불편해하는 표정이었다. 작달막한 남자가 증언석에 올라앉았다. 경찰 진술조서에는 지갑을 털린 피해자로서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말한 그의 진술이 기록되어 있었다.
“정말 자가용 영업을 하는 차 안에서 지갑을 털렸어요?”
내가 물었다.
“그날 내가 워낙 꼭지가 돌아가지고 잘 모르겠는데요….”
그가 멋쩍은 표정으로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그럼 자세히 피해신고를 한 이 진술조서는 뭡니까?”
내가 그의 진술이 적힌 조서를 보여주면서 따졌다.
“그거야 뭐 형사들이 그런 거 아니냐고 얘기하기에 술 취한 김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한 것 같은데 사실 모르겠어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그날 휴대폰도 잃어버렸죠?”
내가 물었다. 수사기록 안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 나중에 형사들이 내가 앉아 있었던 돌 벤치에서 찾아다 줬어요. 그거 잃어버렸는지도 몰랐는데…. 난 솔직히 그날 차 탄 것조차도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피고인석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황기만이 얼굴을 들고 물었다.
“아저씨, 나 본 적 있어요? 알아요?”
“모르는데요. 처음 뵙는데요.”
증인이 겁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다른 증인들도 기억하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공판 검사의 얼굴에 난감해하는 표정이 서렸다. 재판은 몇 번을 공전했다. 다른 증인들도 모두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피고인 황기만 씨는 경찰이 증인을 조작해서 데리고 올지 모르니까 변호사가 잘 다그쳐줘야 한다고 부탁했다. 최후의 증인으로 오십대 중반의 노동자 차림의 남자가 법정에 나왔다. 앞니가 부러지고 무릎을 다친 남자였다.
“강도당했을 때 그 괴 자가용 운전사가 저 사람 맞습니까?”
검사가 물었다. 증인이 황기만을 이리저리 살핀 후 말했다.
“맞아요. 틀림없어요. 내가 잘 가는 식당 주인 뒤통수하고 똑같아서 기억을 분명히 한다니까.”
그때 피고인석에 있던 황기만 씨가 정색을 하면서 따졌다.
“아저씨, 저 보신 적이 있어요? 저는 처음 보는데.”
“들어보니까 목소리도 딱 범인이 맞구만요.”
증인으로 나온 남자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상했다. 한밤중에 술에 취해 영업자가용을 탔는데 모든 걸 그렇게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때 재판장이 경고했다.
“이보세요, 증인. 이건 한 사람이 죄인이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법정입니다. 무조건 딱 맞다고 하지 말고 신중하게 답변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증인으로 나온 남자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변호사인 내가 일어나 물었다.
“자주 가신다는 식당 이름이 뭐죠?”
“모르겠는데요.”
“그날 저녁 술을 얼마나 마셨어요?”
“기억이 안 나는데요.”
“술 먹고 2차로 노래방 간 걸로 진술이 되어 있는데 그 노래방이 어디에 있었고 이름이 뭐였어요?”
“몰라요.”
그는 내가 묻는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학력을 보면 기억력이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 내가 그 흰 차 운전석 창문에 매달려 구둣발로 문 아래 부분을 찼는데 그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요. 내 구두 뒤축은 옛날 거라서 한 번 자국이 나면 지워지지 않는데….”
마지막으로 그를 검거한 형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성실하게 생긴 선생 같은 평범한 인상의 경찰관이었다. 그가 말했다.
“신고를 받고 용의자들을 7명 정도로 압축했어요. 제가 저 사람 황기만을 찍어서 그 집 근처에 숨어 있다가 범행을 할 때까지 계속 은밀하게 추적을 했죠. 그리고 범죄 현장에서 바로 체포를 한 겁니다.”
듣고 있던 황기만이 바로 되받아쳤다.
“말도 안 돼. 당신이 어떻게 날 추적해 왔다는 거야? 그러면 범죄 피해신고가 된 날에 내가 교회에 있었던 것도 알겠네?”
그는 노기를 띠며 펄쩍 뛰고 있었다.
(계속)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