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 골퍼 뒤엔 ‘필드의 제갈량’ 있다
지난 7월 18일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 대회’에서 박인비·김효주·장하나가 자신들의 캐디, 갤러리와 함께 다리를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
프로골퍼와 캐디는 잘나갈 때는 서로에게 귀인(貴人)이 되지만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와 캐디 스티브 윌리엄스처럼 관계가 나빠지면 불편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애증이 교차하는 인간 관계의 축소판이다.
프로골퍼와 캐디의 이상적인 조합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활동 중인 폴라 크리머(미국)와 캐디 콜린 칸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크리머는 2005년 프로 데뷔 후 10년째 콜린 칸 한 명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들은 메이저 대회인 2010년 US여자오픈 우승을 포함해 통산 10승을 합작했다. 투어 내에서 수없이 많은 선수와 캐디가 이합집산 하지만 이들은 ‘일편단심 민들레’다.
칸은 과거 아니카 소렌스탐과 박세리의 백을 매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골퍼들과 함께한 칸은 잉글랜드 국적으로 스크래치 골퍼이며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칸은 매 대회 경기가 열리기 전 대회 코스를 직접 걸으며 거리와 그린 경사 등 다양한 정보를 꼼꼼히 체크해 코스 공략도에 적는다. 그리고 이를 크리머에게 제공하며 본 경기 때 활용한다.
크리머는 박인비의 우승으로 막을 내린 최근 웨그먼스 LPGA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대회 연속 컷통과 기록이 ‘39’에서 중단됐다. 2005년 프로입문 후 올해 브리티시여자오픈까지 메이저 대회 39회 연속 본선라운드 진출이었고, 남자 최고 기록인 우즈의 기록(37경기)을 능가하는 대기록이었니 아쉬운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그 사유가 흥미롭다. 바로 캐디 칸이 허리 통증으로 갑작스레 입원했기 때문이었다.
크리머는 칸의 입원으로 선수 출신 캐디인 메간 프란셀라를 대타로 기용했으나 2라운드에서 77타를 치는 부진으로 탈락했다. 크리머는 경기를 마친 뒤 칸의 부재에 대해 “육체적으로 힘든 건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외동딸인 크리머는 평소 캐디 칸을 친오빠처럼 여겼으며 오는 10월 예정인 자신의 결혼식 때 증인을 부탁해 놓은 상태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안선주(27·모스버거)는 크리머와는 조금 다른 케이스다. 안선주는 12승을 합작한 일본인 캐디와 의도적으로 1년 간 결별했다가 올해 다시 만나 더욱 끈끈한 관계가 됐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 케이스다.
자신의 캐디 칸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윙을 하는 크리머(왼쪽)와 일본인 캐디 모리모토와 필드를 살펴보는 안선주.
2010년 일본무대로 진출한 안선주는 데뷔 전 다이킨 오키드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출발이 좋았다. 그러나 시즌 중반 캐디와의 호흡에 문제가 생기면서 전반기 마지막 대회인 스탠리 레이디스 대회부터 일본인 캐디 모리모토 슈스케와 계약했다. 일본프로골프(JGTO)투어에서 남자 선수들의 백을 매던 모리모토는 예민한 성격의 안선주를 잘 다독거려 메이저 대회인 살롱파스컵을 2연패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둘은 지난해 1년간 따로 활동했다. 안선주는 결별 이유에 대해 “너무 가까워지다 보니 침범하지 말아야 할 사생활까지 침해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막 대한다는 느낌이 싫었다”고 말했다. 안선주는 모리모토와 헤어진 후 하우스 캐디, 아르바이트 캐디 등을 썼고 캐디 모리모토는 한국 선수인 김나리의 백을 맸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안선주는 캣 레이디스와 니토리 레이디스 대회에서 2승을 거뒀고, 모리모토도 김나리와 스튜디오 엘리스 오픈에서 우승했다.
안선주와 모리모토는 지난겨울 다시 만났다. 그리고 올해 모리모토와 함께 이미 3승을 거뒀다. 안선주는 “일 년간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됐다. 또 서로 언행을 조심하는 등 과거보다 관계도 좋아졌다”며 만족해했다. 안선주가 물설고 낯선 일본 땅에서 통산 16승을 거두며 상금타이틀을 2연패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일본인 캐디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무대에서도 선수와 캐디의 모범 사례는 많다. 최근 미국LPGA투어 마이어 LPGA 클래식에서 우승한 이미림(24·우리투자증권)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림은 지난해 국내무대에서 뛸 때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최희창(39)을 전문 캐디로 썼다. 해태 타이거스에서 포수로 뛴 경험이 있는 최희창은 국내무대를 대표하는 전문 캐디로 그동안 서희경과 유소연, 양수진, 양제윤 등 쟁쟁한 선수들의 백을 맸다.
지난해 이데일리 여자오픈 첫날 골프장으로 국제 소포가 배달됐다. 미국에 있는 유소연이 선글라스를 보낸 것이다. 선물상자에는 “오빠 자외선 때문에 눈 상하지 말라고 보내는 거야. 꼭 착용하고 미림이 꼭 우승시켜야 해”라는 손 글씨의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유소연의 열띤 응원이 힘을 발휘했을까. 이미림이 우승했다. 이미림은 우승 기자회견에서 “우승이 결정될 때 누구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캐디 (최)희창이 오빠!”라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과 한 번 인연을 맺은 선수들과는 결별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전문 캐디 최희창은 “선수와의 신뢰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자는 자신을 알아보는 이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캐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강래 헤럴드스포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