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공개 녹취록 실명 언급된 유력 대선주자 불똥 맞나
▲ 지난해 10월 31일 당시 경인방송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왼쪽)과 신현덕 전 대표가 국회 문광위의 방송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했다. | ||
당초 경인방송의 최대주주인 영안모자(백 회장)와 컨소시엄을 주도했던 CBS(신 전 대표)의 경영권 다툼 양상으로 비쳤던 ‘미국 스파이설’ 논란은 지난 6일 CBS가 백 회장의 육성이 녹음된 녹취록의 일부를 공개하고 나서면서 이전투구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여기에는 백 회장 자신이 국내 정보 문건을 작성하는 이유와 그 문건의 미국 모 기관 전달 과정, 그리고 그동안의 국내 정보 수집 활동 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내용의 진위 여부에 따라서는 향후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주)경인방송 측은 “이번 사태의 본질은 경인방송의 허가 추천을 지연시키기 위한 CBS의 비열한 방해 공작인데도 CBS는 마치 무슨 거대한 스파이 음모라도 있는 것처럼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짜깁기한 일부가 아닌 전체 녹취록을 공개해서 그 진위를 검증하자”고 역공을 폈다. CBS 측 역시 “검찰 수사가 끝나는 즉시 전체 녹취록을 공개할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특히 CBS 측이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는 전체 녹취록의 내용 중에는 향후 국내 대선 정국과 한미 관계에까지 그 파장이 확산될 수도 있는 민감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추가 공개 여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번에 공개된 백성학 회장의 녹취록은 약 40분 분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CBS 측은 “백 회장의 녹취록 전체는 4시간 정도 분량”이라고 밝혔다. 이번에는 전체의 6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일부 내용만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녹취록은 어떻게 작성된 것이며, 그 내용의 진위는 어떻게 가려질까. 또 전체 녹취록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기자는 지난 8일 CBS를 방문해서 문제의 전체 녹취록을 확인했다. 하지만 CBS 측은 당초 약속과는 달리 내용을 전부 다 공개하지는 않았다. CBS의 한 관계자는 “변호사 자문을 구한 결과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시점이어서 (예민한) 일부 부분은 가릴 수밖에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는 “검찰 수사가 발표되면 100% 다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 회장의 육성으로 녹음된 5개의 테이프가 만들어진 시점은 지난해 9~10월경이다. 녹음을 한 당사자는 신현덕 전 대표다. 신 전 대표는 백 회장으로부터 ‘국내 정보 보고 문건’ 작성을 지시받고 몇 차례 보고 문건을 만든 뒤 갈등을 겪다가 9월경 CBS 측에 고민을 털어놨고, 그때부터 녹취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미공개 부분까지 포함한 전체 녹취록은 크게 여섯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은 백 회장 자신이 국내 정보 문건을 작성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즉 자신의 살아온 이력을 설명하며 그동안의 자신의 정보 수집 활동에 대한 설명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정보 수집 내용이 미국의 기관에 어떤 경로를 통해 보고되는지에 대한 설명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된다.
또한 그동안 본인이 활동해온 주요 내용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이 가운데엔 한미 관계의 전시작전권 관련 사안과 북핵문제 등에 대해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과 한국의 정보 수집 관련 인물들의 실명도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CBS가 공개한 백성학 회장 육성 녹취록. | ||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왜 국내 방송 사업에 뛰어들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왜 방송 사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BS가 지난 6일 이미 공개한 녹취록 중에는 백 회장이 1970년대 중반부터 정보수집 활동을 해왔고, 수집된 자료가 국내의 한 사무실에서 영어로 번역돼 워싱턴 DC에 본부가 있는 어떤 기관에 전달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기도 하다.
현재 정·관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녹취록에 국내 정부부처 고위 관계자와 정치인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는 부분이다. 이미 백 회장이 이상업 전 국정원 2차장과의 친분을 과시한 대목은 녹취록 중 공개된 분량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미공개 분량에는 그 외 상당수의 국내 인사들의 실명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CBS의 한 관계자는 “실명이 거론된 국내 인사들은 정부부처 고위 관계자와 정치인들이 대부분”이라며 “여기에는 현재 유력 대권주자로 소개되는 분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아무개 장관이 정보 달라고 구걸한다’, ‘아무개 의원이 정보 달라고 사정한다’는 등 현 정권의 고위 인사와 장관 및 의원들도 등장한다”며 “의원 중에서는 여당 의원뿐만 아니라 야당 의원도 같은 비율로 함께 등장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가 기자에게 일부 보여준 녹취록 가운데에는 현 참여정부의 장관을 지냈고 현재 국제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 중인 한 고위인사의 이름도 언급돼 있었다.
녹취록에는 이 외에도 다수의 수사관계자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CBS의 한 관계자는 “검찰 인사도 등장하는가”란 기자의 질문에 “노코멘트”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경인방송 측은 9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CBS는 백 회장이 한 말이라는 점만 내세워 전체 말의 앞뒤를 생략한 채 중간 부분만 소개하고 있다.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도 확인할 수 없고, 그 의미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해설’을 덧붙여 자신의 의도대로 몰아가고 있다.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의 짜깁기 의혹이 짙은 만큼 전문가의 검증을 통해 그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하게 항변했다.
경인방송의 한 관계자는 “이번 녹취록 공개에 대해 백 회장은 ‘몇 개월 전에 사석에서 한 말을 정확히 다 기억은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발언 전체를 다 보여주면 내가 당시 무슨 취지에서 어떤 목적으로 한 말인지 이해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인데, 앞뒤 모두 자르고 한마디 한 것만 소개하고 있어 그 발언의 취지를 정확히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현재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남부지검 측은 무척 신중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당초 수사 결과도 올해 상반기의 검찰 인사이동 전인 2월 말경에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가 현재까지 미뤄지고 있다. 검찰은 이미 전체 녹취록을 수사 과정에서 모두 입수해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CBS가 일부 내용을 먼저 공개하고 나서자 다소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형사6부의 담당 검사는 “사건과 관련해서 어떤 입장도 밝힐 수 없다”고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번 스파이 논란이 거대한 ‘진실게임’ 양상으로 번진 배경을 놓고 경인방송 측은 “방송 허가추천을 방해하기 위해 CBS가 계속되는 폭로전으로 검찰 수사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작전을 구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CBS 측은 “검찰이 백 회장의 자택과 사무실을 압수수색 했을 때 파일만 몇 만 개였다고 한다. 검찰에서 이미 상당한 수사 자료를 다 확보한 것으로 안다”며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입장을 나타냈다.
향후 검찰 수사 발표 이후 CBS가 아직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녹취록을 전부 공개할 경우 그 진위 공방은 한층 더 가열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과정에서 실명으로 등장한 국내 유력 인사들이 노출될 경우 사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