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으로 탈출 안간힘 신뢰는 점점 침몰
지난 9월 2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5·19 대국민 담화 모습으로 박 대통령은 이날 담화 발표 이후 의도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사진제공=청와대
그러나 이런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박 대통령은 회의 모두발언에서 최근 남부 수해지역 피해 복구 대책, 연안 여객선 안전 대책, 싱크홀 대책 등은 언급했지만 세월호의 ‘세’자도 꺼내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다만 회의 말미에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세월호 승무원들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는 바람에 많은 희생이 발생했다면서 철저한 책임 추궁과 일선 현장에서의 의식 교육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때에도 박 대통령은 ‘세월호’라는 표현은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지난번에도 (선장 등 승무원들이) ‘빨리 갑판 위에 올라가라’는 말 한마디만 했으면 많은 인명이 구조될 수 있었는데…”라는 식으로 에둘러 말했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하지 않는 듯한 박 대통령의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5월 19일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 담화 발표 이후 줄곧 그랬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국무회의 자리에서 간혹 세월호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곁가지에 불과했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빨리 검거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 “세월호 참사 이후 내수 침체가 심각하다”고 우려를 표할 때, 프란치스코 교황과 외국 정상들에게 “세월호 참사 때 보내준 위로에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할 때에만 세월호를 입에 올렸다. 그 대신 박 대통령은 규제 개혁과 일자리 창출 등 경제 활성화, 국가 혁신 등에 메시지를 집중했다.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이 5·19 대국민 담화를 ‘세월호 추모기’에서 ‘일상 회복기’로 전환하는 기점으로 잡았다고 봐야 한다”며 “대통령과 정부, 여당으로서는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챙길 수밖에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로 인한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시도가 의도적인 ‘거리두기 전략’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런데 추석 연휴를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져 나오면서 박 대통령의 이런 세월호 거리두기 전략의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전략이 당장의 정치적 위기를 넘어서는 방편도 못 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민생·경제 이슈를 중요시하면서도 세월호 유족들에 대해서는 온정적이다.
KBS-미디어리서치 조사(8월 30일, 성인남녀 1000명 대상 유·무선 RDD 조사, 표본오차 95% ±3.1%포인트)에서 세월호 특별법 재합의안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의견을 물은 결과 ‘다시 협상해야 한다’는 응답이 53.7%, ‘재합의안대로 통과시켜야 한다’는 응답이 41.6%였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부여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58.3%가, 여야와 유가족이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구성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65.8%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박 대통령이 유가족들을 직접 만나 세월호 특별법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60.6%가 ‘대통령이 유족을 만나야 한다’고 답했다.
이런 여론의 흐름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장외투쟁과 세월호특별법-민생법안 연계투쟁, 문재인 의원의 단식 등에 대해 반대 의견이 60∼70%에 달하는 응답이 나온 것과 대비된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국민들이 세월호 문제를 정치 쟁점화하려는 시도는 경계하면서도 유가족들의 호소에는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서 “이는 동시에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세월호 문제 대처 방식이 국민들에게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비치고, 결과적으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문화일보>-엠브레인 조사(8월30∼31일)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검찰과 경찰, 감사원 등의 수사 및 조사 결과를 신뢰하는지를 물은 결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62.9%에 달했다. ‘신뢰한다’는 답변은 32.1%에 불과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지지율도 조사 기관에 상관없이 일제히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문화일보>는 이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와 정치권, 박근혜 대통령 모두 세월호 참사를 거치면서 ‘신뢰의 위기’에 봉착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신뢰의 위기에 빠진 게 정책 집행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정치평론가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는 소위 ‘민생·경제 프레임’으로 ‘세월호 프레임’에서 탈피하려던 박 대통령과 여권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면서 “청와대와 정부여당의 세월호 처리 방식에 대해 국민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특히 2030세대뿐 아니라 40대까지 반 박근혜 성향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며 “박 대통령의 시도가 오히려 반대세력 공고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