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돌부처’ 최정 ‘철벽 수비’ 빛났다
루이나웨이 9단(왼쪽)과 최정 4단의 궁륭산병성배 결승국.
이날 바둑은 330수에 이르는 대접전이었다. 루이 9단이 초반을 잘 이끌었다. 중반 입구까지 ‘선착의 효’가 살아 있었다. 루이 9단은 집에서 앞섰고, 두터움에서도 밀리지 않으면서 우세를 이어갔는데, 최정 4단이 좌상변 흑진에 뛰어들면서부터 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은 백돌을 공격하기 전에 반대편 우상귀 쪽에서 날카로운 잽 한 방을 날렸다. 공격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최 4단이 그 순간을 낚아챘다. 응수타진을 외면하고 우상귀 흑집을 떼어내 형세를 따라잡으며 힘을 내더니 좌상변 접전에서는 강·온을 적절히 섞어 상대를 교란하며 흐름을 반전시킨 것. 그게 134수의 시점. 루이 9단의 반격도 처절하고 집요했다. 버틸 수 있는 대목에서는 다 버텼고, 찔러볼 만한 곳은 빠짐없이 찔러보면서 330수에 이르도록 한사코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여자 이창호’ ‘소녀 돌부처’라는 별명의 최 4단은 그 별명 그대로 끝까지 실족하지도 넘어지지도 않았다.
“루이 9단의 날카로운 응수타진을 머쓱하게 만들며 역전의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나 수순의 묘를 구사하면서 강수를 드리블한 것도 그랬지만, 134수에서 330수로 바둑이 끝날 때까지 루이 9단의 온갖 공격과 줄기찬 흔들기를 막아낸 것이 더 훌륭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건데, 최 4단은 수성의 솜씨가 더 멋지고 대단했다. 승부는 2집반이었지만, 우리 식이었으면 1집반이었다(우리는 덤이 6집반, 중국은 7집반). 1집반이면, 까딱하면 뒤집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걸 200수 동안 지켜낸 것이다. 최 4단의 이번 승리는 자신의 첫 세계 타이틀이라는 것 이상의 뜻이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루이를 꺾은 것이기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 부를 만하다. 의미가 지대하다.” 우리 검토실의 찬사였다.
그렇다. 공로가 크다. 루이 9단은 20여 년 전, 전 말 못할 사정으로 중국을 떠나 일본에서 우칭위안(吳淸源) 선생의 마지막 제자로 공부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는 등 여러 곳을 방랑한 후 1999년에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정착해 10여 년 동안 여자 기전을 석권하고는 얼마 전 중국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열정이 변함없어 어린 후배들과 함께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바둑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아무튼 루이가 한국에 있던 시절 그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루이 9단 덕분에 한국 여자프로가 향상된 것도 사실이지만, 루이에게 다소 주눅이 들어있었다는 것도 사실이어서 루이 극복은 화두이자 숙제였는데, 그걸 마침내 최 4단이 풀어낸 것.
세계 바둑계의 새로운 여제(女帝) 최정을 탄생시킨 결승전의 하이라이트를 소개한다. <1도>는 중반의 변곡점을 만든 장면. 최정이 백1로 좌상변에 뛰어들었는데, 루이는 대응을 보류하고 흑2로 묘한 곳을 끊었다. 백1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방향을 잡기 위한 원모(遠謀)의 응수타진이었다. 그러나 최정은 끊거나 말거나, 백3으로 다시 우상귀에 뛰어 들어갔다.
<2도> 백2로 몰고 4로 잇는 것이 보통의 행마법이지만, 지금은 이게 흑의 주문이라고 한다. 흑A-B-C 등의 선수가 남고, 좌상변 전투가 확산될 때 흑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것들을 활용할 것이다. 하변에서 흘러나온 백 대마도 신경이 쓰인다. <3도> 백2로 느는 것도 흔히 두는 수인데, 그러면 지금은 흑2로 귀를 막는다. 이게 선수인 것. 흑은 선수로 막았으니 물론 만족. 백이 계속 응수하지 않으면? <4도> 흑1, 3이 기다리고 있다. 백 다섯 점이 잡힌다.
<5도>가 실전진행. 일단 흑1로 찌르고 3으로 단수. 돌의 체면이며 기세다. 그러자 백4로 한 번 더 들어갔고 흑5에는 백6으로 우상귀를 전부 빼앗았다. 백이 집의 균형을 맞추며 형세를 바로잡는 장면이었다. 계속해서….
<6도> 흑1, 여기를 막지 않으면 상변은 공배가 된다. 백은 손을 돌려 좌상귀 쪽에 2로 맥을 짚었다. <1도> 흑2의 끊음과 비슷한 맥락의 응수타진. 상변 백 한 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여기를 물어보고 방향을 정하겠다는 것. 예컨대 그냥 <7도> 백1부터 움직이는 것은 5까지 집을 벌 수는 있지만, 흑6, 8처럼 하변 백 대마 전체에 들이대는 수 같은 게 겁난다. 백전노장 루이에게 이런 전투는 전공과목이다. <6도> 백2를 보고 흑도 우상귀 쪽에서 3, 5로 잡으며 숨을 고른다, 백6, 8을 기다려….
<8도> 흑1로 반발. 그러자 백2로 하나만 젖혀 놓고 4에서 8로 이쪽 관통해 마침내 형세를 역전시켰다, 우승 고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궁륭산병성배는 제1, 2회를 우리 박지은 9단이 연패했고, 3회는 중국의 리허 5단(22), 4회는 왕천싱이 우승했다. 최정이 3년 만에 트로피를 찾아온 것. 제한시간 각자 2시간에 1분 초읽기 5회. 우승 상금은 25만 위안(약 4200만 원), 준우승은 10만 위안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