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도 말년엔 김정일에 추하게 ‘아부’
이런 상황에서 미국 조지메이슨 대학 김현식 연구교수(75)가 북한 사회 상층부의 내부 시스템과 북한을 움직이는 로열패밀리들의 내밀한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사 등을 책으로 펴내 주목받고 있다.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김영사)이 바로 그것.
김 교수는 평양사범대 교수로, 또 북한 최고위층 자제들의 개인교사로 40년 가까이 북한 교육의 핵심 위치에서 활동하다 지난 92년 한국으로 망명한 인물. 이후 국내 대학의 강단에 서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 교수는 예일대 초빙교수로 북한학을 강의했고 오는 9월부터는 하버드대학 강단에도 설 예정이다.
김 교수는 <나는 …유목민>에서 오랜 기간 김일성 처가 자녀들의 개인교사로 활동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평양 로열패밀리들의 생활상과 이들에 얽힌 에피소드를 실감나게 다루고 있다. 또한 ‘망명객’ 황장엽 씨와 송환 장기수 리인모 씨, KAL기 폭파범 김현희, 우크라이나 여인과의 사랑으로 탈북자가 된 북한 최고의 수재 김지일, 남한 여배우 윤정희 납치시도사건 등 유명인사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도 담아내 눈길을 끈다.
# 황장엽 일가 그후
김 교수가 ‘인연’을 맺은 북한의 고위층 인사 및 유명인들은 수없이 많다. 황장엽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김 교수는 1985년 봄 러시아 공산당 책임자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황장엽 씨의 통역을 맡는 것으로 그와 첫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앙당 국제비서’로 김일성과 김정일의 국제문제 고문을 맡고 있던 황 씨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대단한 위치의 인물이었다. 그런 높은 양반의 통역을 맡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는데 황 씨의 날카로운 눈매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는 것. 러시아말을 곧잘 했던 황 씨는 김 교수의 통역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헛기침으로 넌지시 알려주었다고 한다. 황 씨는 면담 후 “어려운 통역 하느라 수고하셨소”라는 말과 함께 당시 고위 간부들이나 쓸 수 있던 샤프펜을 김 교수의 윗주머니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그로부터 25년 후 서울에서 황 씨를 다시 만나게 된다.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맡으면서 11년이나 북한의 핵심권력자로 살았던 황 씨였지만 서울에서 재회했을 때 그는 김 교수와 똑같은 ‘탈북자’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가족을 잃고 홀로 남한에서 살아가는 처지인지라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느끼며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철학자로서 늘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여왔던 황 씨가 북에 남아 고초를 겪었을 가족에 대한 염려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목격했던 얘기도 전하고 있다. “이제라도 돌아가시지요”라는 김 교수의 말에 황 씨는 “이젠… 두 총알에 맞아 죽게 생겼소”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자신의 고통스런 심정을 표현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또 황씨의 부인 박승옥 씨의 자살과 황 씨의 망명으로 졸지에 수용소로 끌려가는 신세가 된 황 씨의 자녀들과 외국으로 추방된 며느리의 ‘고약한 운명’에 대한 얘기도 같이 담아내고 있다.
▲ 1998년 추석에 만난 황장엽 씨(왼쪽)와 김현식 교수(가운데). | ||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 당시 테러혐의로 김현희가 붙잡힌 뒤 평양에서는 ‘남조선의 자작극을 평양에 넘겨씌우는 날강도 짓’이라며 연일 규탄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김 교수는 집회에 참석했을 당시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교수와 나눈 얘기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자살하려다 살아났다는 그 여자 공작원이 당신네 대학 일본어과 여학생 맞지 않아?”라는 김 교수의 질문에 일본어과 교수는 “당신 목숨이 몇 개나 되는 줄 알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라며 말을 막았다고 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미 김현희의 신상에 대해 들은 바가 있던 터였다. “우리과 여학생도 한 명 공작원으로 뽑혀 갔거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겨서 며느리 삼고 싶었는데 말이야. 차영애라고.”
그러자 일본어과 교수는 머리를 숙여 나직이 말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어제 대학 당 비서가 우리 과 교수랑 학생들을 모아놓고 경고를 했네. 그 여자 문제 갖고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큰일 날 거라고.”
“그러니까 자네 학과 여학생이란 말이지?”
“그렇지. 김현희 아버지가 무역일꾼이라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김 교수는 무역부에 있는 제자로부터 “남한 비행기 폭파사건 범인으로 잡힌 여자의 아버지가 북한 무역일꾼이었다는 말을 절대로 흘리면 안된다”는 각별한 주의를 들었다고 한다. 외국에 자주 드나들던 김 교수에 대한 사전 경고였다.
#리인모 씨 막전막후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 종군기자로 남한에 왔다가 체포되어 4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리인모 씨. 전향서 한 장이면 남한에서 편히 살 수 있었음에도 리 씨는 전향을 거부하고 버티다가 1993년 북한으로 돌아가 ‘영웅’ 칭호를 받았다. 김 교수는 리인모 씨와의 각별한 인연에 대해서도 밝혀 눈길을 끌고 있다.
리인모는 김 교수의 외갓집 식구들과 같은 함경도 풍산 출신으로 한때 김 교수의 이모와 연애를 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이모는 리 씨에 대해 ‘똑똑하고 잘생긴 데다가 글도 잘 쓴다’고 칭찬하곤 했는데 김 교수는 우연히 리 씨의 딸인 리현옥과 만나게 된 사연을 전하고 있다.
그가 물리학과 졸업반 로어(러시아어) 수업에 들어갔을 때 눈에 띄게 똑똑한 여학생이 있어 얘기를 나눠봤더니 그녀가 바로 리 씨의 딸이었다는 것. 당시 리 씨의 가족들은 리인모 덕분에 북한 정부로부터 엄청난 특혜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남파 공작원의 가족은 정부로부터 최상의 대우를 받는 반면 공작원이 전향할 경우에는 가족과 친척 모두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몰살당한다”며 “리인모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전향하지 않고 버틴 것은 사상 때문이 아니라 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1960년 김 교수는 로어 로문학과 졸업생들을 데리고 개성고급중학교에서 한 달간 교육실습을 하면서 김량생이라는 간호장 여성을 알게 된다. 제주도가 고향인 김 간호장은 공작원 남편을 두고 호화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부부 모두 외로운 월북자 처지였던 터라 김 교수는 그 집에 자주 드나들며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1980년대 말 김 교수는 김 간호장으로부터 고민 섞인 얘기를 듣게 됐다고 한다. 김 간호장의 남편인 박제일에게는 프랑스에 사는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의 남편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화가였다. 그 화가는 평양 중앙미술박물관에서 북한 최초의 개인 미술전람회를 열었는데 이 전람회를 계기로 박제일은 당의 큰 신임을 얻게 됐다는 것. 그러나 박제일의 누나가 남조선 출신 피아니스트와 그의 처를 북조선으로 납치해 오는 공작에 실패하면서 당의 신임이 예전같지 않아졌다는 것이 김 간호장의 고민이었다.
김 교수는 서울에 넘어와서야 당시 납치 공작을 폈던 박제일의 누나가 박○○이고 그녀의 남편이 이○○ 화백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의 누나가 줄을 놓아 북한으로 데려가려 했던 피아니스트는 백건우이며 그의 처는 바로 영화배우 윤정희였다.
#김일성 주석의 부부싸움
김 교수는 김일성의 부부싸움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데 그 저변에는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진 집안의 권력다툼 문제가 깊숙이 개입돼 있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관련 내용 전문.
‘당시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받았던 인물은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 후처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이었는데 본처의 아들인 김정일이 이복동생 김평일에게 권력을 넘겨줄 리는 만무했다. 평소 김정일은 아버지와 김성애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틈을 타 쐐기를 박아야 한다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김일성은 오래전부터 김일성 광장 뒤편의 언덕을 무척 아끼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간부들과 함께 그 곳을 방문했더니 이미 그 자리에 번듯한 집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동생 김성갑의 집이었다. 화가 잔뜩 난 김일성은 그날 오후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성갑을 두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며 호되게 비난했는데 그 자리에는 김성갑의 누나인 김성애도 있었다.
김성애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성갑이 그애가 뭘 그리 잘못했나요? 그 애가 자기 혼자 잘 살자고 그랬나요? 당신 장모를 잘 모시려 그런 것 아닌가요? 장모가 번듯한 집에 살면 당신 위신이 떨어집니까?”라며 따졌다.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 김일성은 숟가락으로 밥상을 내리쳤고 성격이 불 같은 김성애는 “당신 부모 묘는 요란하게 꾸며놓더니 우리 엄마는 좋은 집에 살면 안됩니까?”라며 밥상을 걷어찼다. 김일성이 김성애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 김평일이 겨우 말려 김성애를 데리고 나갔다. 김정일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다음날 김정일은 부부싸움으로 심기가 불편한 김일성에게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지금 돌아가는 형편이 우습습니다. 여성동맹이 김성애 위원장을 등에 대고 당 조직 위에 올라앉아 당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형편입니다. 김성애 위원장의 활동연구실을 김일성 혁명역사연구실보다 더 요란하게 꾸며놓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김성갑입니다. 성갑이는 매일 마약주사를 맞고 주사 없이는 살지 못하는 지가 오랩니다.”
“뭣이? 성갑이가 마약중독자란 말이야? 그 사실을 누나가 알고 있나?”
“알고 있을 겁니다.”
“아니 이런 미친놈이 있나? 그런 미친놈이기에 내 승인도 없이 집을 마구 짓고 돌아치지. 미친놈!”
김일성은 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동안 말을 안 했냐고 펄펄 뛰었고 김정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모에게서 난 김평일과 후계자 경쟁을 벌여야하는 김정일로서는 대단한 성과를 올린 셈이었다.’
#김일성의 노망
김 교수는 김일성이 적어도 인민을 위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김 교수는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추하게 늙어가던 모습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1992년 김정일의 50세 생일이 되었을 때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게 바치는 시를 써 올렸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 있고, 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며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 충효 겸비하니 모두 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 땅을 흔든다.”
아들을 칭송하는 시를 김일성은 유치원 아이들부터 늙은이까지 모두 외우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 각 기관별로 ‘김정일에게 보내는 송시 외우기 대회’까지 열게 했다는 것. 김일성은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준 뒤 판단력도 잃은 채 아들에게 아부하며 말년을 보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얘기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