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군패션’ 알고보니 ☞ 유니폼 착용의 정석
지난 4월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과 KIA의 경기에서 6-0으로 승리한 KIA 선수들이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KIA 이대형(오른쪽 두 번째)은 ‘농군패션’이 잘 어울리는 선수로 손에 꼽힌다. 연합뉴스
#야구 유니폼은 어떻게 생겼을까
야구의 첫 공식 유니폼은 흰색 플란넬 셔츠, 파란색 울 바지, 그리고 밀짚모자였다. 1849년 미국 뉴욕의 니커보커스라는 야구 클럽에서 처음 입기 시작했다. 활동성이 조금 좋은 평상복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150년이 흐르는 동안 야구 유니폼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초기에는 팀 별로 유니폼에 큰 차이가 없어서 스타킹의 색으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했다. 스타킹을 무릎까지 올려 신는 일명 ‘농군 패션’이 사실은 원래 유니폼을 착용하는 기본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 소속팀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상과 로고, 마스코트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유니폼에도 이런 특징들이 반영됐다. 삼성의 파란색, 뉴욕 양키스의 스트라이프 등이 대표적이다.
1849년 미국 뉴욕의 니커보커스 야구클럽의 초창기 유니폼.
현재 프로야구에서 뛰는 선수들은 팀 별로 같은 색, 같은 형태,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착용한다. 그만큼 통일성이 중요하다. 야구 셔츠와 바지, 신발, 양말, 모자, 벨트까지 모두 ‘같은 유니폼’ 안에 포함된다. 한때는 투수들과 야수들의 글러브도 유니폼의 일부로 규정해 한 팀 선수들이 모두 같은 제품을 쓰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다.
#반짝이는 물체는 금지! 광고는 무제한
금지된 조항도 있다. 팀 유니폼 색과 다른 색의 테이프를 붙여서는 안 된다. 야구공을 모방하거나 연상시키는 모양이 유니폼 디자인에 포함돼 있어도 안 된다. 유리나 금속처럼 반짝이는 물체도 부착 금지. 선수들의 시야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광고는 무제한으로 붙일 수 있다. 구단 수익의 많은 부분이 광고에서 나오니 어쩔 수 없다. 예전에는 ‘유니폼 상의 소매 한 군데에 한해 60cm 이내의 광고를 허용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최근에는 그 제한마저 없어졌다. 헬멧 옆 부분, 유니폼 셔츠 상단과 소매 등 곳곳에 모기업이나 후원사의 이름이 붙어 있다. A 선수는 “광고의 필요성을 알고 있지만, 유니폼에 팀 이름과 선수의 등번호만 새겨진 뉴욕 양키스의 유니폼(양키스는 야구가 ‘팀 스포츠’라는 이유로 선수의 이름도 새기지 않는다)이 가끔 멋있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라고 고백했다.
류현진의 ‘1000K 달성 기념’ 유니폼(사진제공=한화 이글스)과 두산 ‘킨스데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미란다 커(사진제공=두산 베어스).
#홈과 원정 유니폼 색이 다른 이유
프로야구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은 홈경기 용과 원정경기 용으로 나뉜다. 홈 유니폼은 흰색, 원정 유니폼은 팀을 상징하는 색으로 제작된다. 홈과 원정 유니폼을 구분하게 된 기원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야구의 발상지인 미국에서도 예전에는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고 흰 유니폼을 입었고, 한국 프로야구 역시 초창기에는 유니폼이 넉넉하지 않고 제작비도 부족해 흰 유니폼 하나로 통일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렇다. 과거에는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을 빨아 입어야 했고, 세탁시설이나 세제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원정경기를 떠난 선수들이 땀에 찌들고 흙에 뒹굴며 더러워진 유니폼을 세탁하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원정팀은 옷을 빨지 않아도 티가 덜 나는 유색 유니폼을 입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어센틱’과 ‘레플리카’의 차이
프로야구 각 구단은 시즌이 시작하기 전 선수들에게 홈과 원정 유니폼을 각각 세 벌씩 지급한다. 그러나 한 시즌을 치르다 보면 경기 도중 찢어지기도 하고 원정 이동 과정에서 분실하는 일이 다반사다. B 선수는 “보통 1년을 입으면 홈과 원정 유니폼 여섯 벌씩 총 열두 벌 정도를 받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스타 선수들은 가끔 주변 지인들에게 ‘직접 입는 유니폼을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B 선수는 “원칙적으로는 유니폼도 구단의 재산이고, 경기용 유니폼과 팬들이 입는 유니폼이 다르기 때문에 시즌이 끝나기 전에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유니폼은 어센틱(authentic)과 레플리카(replica)로 나뉘어 판매된다. 어센틱은 선수용과 똑같은 원단으로 제작된 제품. 과격한 동작을 하거나 그라운드에서 뒹굴어도 잘 찢어지지 않는 재질이다. 경기용 유니폼과 90% 이상 흡사하다. 레플리카는 말 그대로 모사품이다. 디자인과 로고, 색상이 동일해도 원단의 퀄리티나 디테일이 확실히 뒤처진다. 당연히 어센틱이 레플리카에 비해 두 배가량 비싼 가격으로 책정된다.
#‘제3의 유니폼’도 있다
유서 깊은 팀들은 ‘어게인’, 혹은 ‘레전드’라는 이름 아래 선수단 전체가 올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는 ‘이벤트 데이’를 마련하곤 한다. 특히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1984년과 1992년의 유니폼을 그대로 본뜬 올드 유니폼을 처음 제작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롯데는 이 외에도 선데이유니폼, 밀리터리유니폼, 연습복유니폼, 유니세프유니폼 등 수많은 종류의 유니폼을 보유하고 있다. 롯데 선수들이 한때 “우리도 가끔 언제 뭘 입어야 할지 헷갈릴 정도”라고 농담했을 정도다. 또 여성팬이 많은 서울 연고팀 두산은 ‘퀸즈데이’에 맞춰 선보인 분홍색 유니폼으로 큰 인기를 모았고, 레전드의 산실인 한화는 ‘류현진 1000탈삼진 달성 기념 유니폼’이나 ‘구대성 은퇴 기념 유니폼’ 등을 한정 제작해 팬들을 즐겁게 했다.
롯데 자이언츠 ‘올드 유니폼’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메이저리그에서도 ‘제3의 유니폼(Third jersey)’ 문화는 활성화돼있다. 샌디에이고는 군사도시를 상징하는 밀리터리 유니폼이 유명하고, 뉴욕 메츠는 일주일에 한 번 검은색 유니폼을 입는다. 토론토는 캐나다 건국기념일에 국가를 상징하는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한다. 그러나 단 한 팀, 뉴욕 양키스는 창단 이후 홈과 원정 이외의 다른 유니폼을 제작하지 않았다. 엠블럼과 색도 늘 처음과 똑같다. ‘세계 최고 명문구단’이라는 자존심이다.
#진짜 좋은 유니폼이란?
선수가 한 팀에 입단하는 순간, 입어야 할 유니폼은 정해진다. 프리에이전트(FA)가 되지 않는 이상, 선택권은 없다. C 선수는 “모든 선수들이 소속팀 유니폼에 만족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불만을 느끼는 선수들도 많다”면서 “선수들도 기왕이면 멋진 유니폼을 입고 뛰고 싶은 게 당연하다. 소위 ‘얼굴을 살려주는’ 유니폼을 입는 구단을 부러워할 때도 있다”며 웃었다. 한국 프로야구 특성상 프로야구단 유니폼은 모그룹이 원하는 이미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유니폼 디자인이나 색상이 몇 년 간격으로 바뀌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근 한 구단은 TV 중계를 보던 구단주의 지시에 따라 시즌 도중 경기용 모자를 전면 교체하기도 했다. D 선수는 그러나 “팀 성적이 좋으면 디자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유니폼을 입는 팀이 어떤 팀인가에 유니폼의 진짜 가치가 달려 있다”며 “야구를 하는 어린 선수들이 ‘나도 나중에 프로에 가서 저 유니폼을 입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면, 그게 최고의 유니폼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니폼은 그저 ‘패션’이 아니라 ‘팀’ 자체를 상징한다는 의미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오승환이 실감한 한일 유니폼 규정 차이 부상 선수 등번호 모자에 썼다가 ‘주의’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소방수였던 오승환(32·한신)은 일본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 도중 심판에게 경고를 받았다. 오승환이 유니폼 관련 규칙을 어겼다는 지적이었다. 모자에 새긴 ‘7’ 때문에 주의를 받은 오승환. 사실 한국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다. 선후배가 관계가 끈끈한 한국은 동료 선수가 크게 다치거나 안 좋을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모자나 유니폼에 동료에 대한 응원의 마음을 담아 등번호나 이니셜을 적어 놓는 일이 잦다. 지금 경기장에 서 있을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자는 뜻에서다. 오승환도 삼성 시절 한국시리즈 때 팔꿈치 수술로 엔트리에서 빠진 팀 선배 권오준의 등번호를 모자에 써 넣은 채 공을 던졌고, KIA 양현종은 대퇴골두육종이라는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 이두환(전 두산)을 기리기 위해 소속팀은 물론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 모자에도 ‘두환’의 이니셜인 ‘DH’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일본은 달랐다. 모자에 소속팀 이름과 선수의 등번호 외에 다른 숫자나 글자를 새기는 일이 금지돼 있다. 유니폼이나 복장과 관련해 한국보다 더 까다로운 조항들이 많다. 일본에서 처음 뛰어 보는 오승환이 규칙을 몰랐던 게 당연하다. 오승환은 “안 해야 하는 일인지 몰랐다. 그렇다면 안 하면 된다”며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 언론들도 오승환의 동료애를 대서특필하며 찬사를 보냈다. 규정은 어겼지만, 한국의 정(情)은 빛났다. [은] |
야구감독 정장 아닌 유니폼 입는 이유 초창기부터 불문율 축구, 농구, 배구 등 다른 구기 종목의 감독들은 정장을 입고 벤치에서 경기를 지휘한다. ‘신사적으로 경기하자’는 의미로 감독들이 격식을 갖춘 옷을 차려 입고 맞붙는다. 그러나 야구감독만은 다르다.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착용한다. 이 작은 차이점 하나가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을 반영한다. 2014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참가한 각 구단 감독들. 사진제공=삼성·KIA 많은 야구 관계자들은 “초창기 야구에는 감독이 따로 없고 주장이 감독 역할까지 맡는 일이 많았다. 주장도 선수이니 당연히 유니폼을 입었고, 이때 생긴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증언했다. 지금은 아예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모두 더그아웃에서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 생겼다. 다른 해석도 있다. 일부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간의 일체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야구의 특성상 감독들도 유니폼을 입어 소속감을 표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한 감독은 “축구, 농구, 배구 등의 유니폼은 종목 특성상 선수들이 입고 뛰기 편한 재질과 디자인이라 감독들이 입기에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야구 유니폼에는 유일하게 벨트가 있고 상하의의 체계가 갖춰져 있다. 감독이 유니폼을 입어도 충분히 권위와 격식을 갖출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유니폼 착용’은 경기가 열리는 그라운드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구기 종목에서는 감독이 코트나 그라운드에 들어갔을 때 퇴장 명령을 받는다. 야구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감독이 경기 도중 중요한 상황에서 팀의 주축 투수를 격려하거나 교체해야 할 때 직접 마운드에 오른다. 심판에게 판정에 대해 항의를 할 때 그라운드로 달려 나가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에서도 감독들의 유니폼 착용이 의무가 된 것은 1950년대 말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도 많은 감독들은 약속이나 한 듯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지켜봤다. 유니폼을 입지 않았던 감독은 단 두 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1894년부터 1950년까지 피츠버그와 필라델피아 사령탑을 맡았던 코니 맥 감독이다. 그는 늘 유니폼 대신 정장에 넥타이, 중절모를 착용했다. 투수를 교체하거나 심판에게 항의할 때는 늘 코치를 내보냈다. 87세의 나이로 야구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퇴장 처분을 받지 않았던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또 한 명은 1948년부터 3년간 LA 다저스 감독을 지낸 버트 샤튼이다. 그가 은퇴한 후로는 유니폼 착용을 거부하는 야구 감독은 나오지 않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