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오리발’엔 ‘딱한 사정’ 있다
▲ 지난 99년 삼성 측 관계자가 삼성차 부채 상환 계획에 대해 발표하는 모습. 당시 2조원대였던 삼성차 부채는 5조원으로 불어났다. | ||
삼성차 소송은 2005년 12월 9일 서울보증보험을 비롯한 14개 채권금융기관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계열사를 상대로 청구 소송을 내면서 시작됐다. 청구 내역은 부채 2조 4500억 원과 지급 지연이자 2조 2880억 원이다. 원금에 연 19%의 이자가 붙어서 결국 5조 원에 달하는 금액으로 불어났다.
이건희 회장은 어쩌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빚’을 떠안게 되었을까. 게다가 왜 원금을 갚지 않아 부채가 두 배가 될 지경까지 오게 되었을까. 전례 없는 압수수색이 펼쳐지고 있는 삼성 특검으로 인해 세인의 주목은 덜 받고 있지만 채권단과 삼성 측은 엄청난 액수의 소송가액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혈전을 벌이고 있다.
소송의 전말은 IMF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자동차는 이건희 회장이 의욕적으로 벌인 사업이었다. 그에게는 반도체 사업이 있었지만 경제적 파급효과가 큰 자동차 사업 진출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삼성자동차는 1년도 되지 않아 쓰디쓴 실패를 맛보게 된다. 결국 삼성차는 1999년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2조 4500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부채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IMF 이후 여러 대기업들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하고 줄줄이 도산하고 몇몇 그룹은 해체되었으며 총수는 경영권 박탈은 물론 구속까지 되는 사태를 맞았다. 자칫 잘못하면 이건희 회장 역시 이런 달갑지 않은 경험을 겪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위기의 순간에 이 회장은 해법을 제시했다. 이 회장은 1999년 7월 2일자 몇몇 국내 일간지 1면에 ‘삼성이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이라는 광고를 게재한다. 여기서 그는 “삼성은 기업의 부채를 국민의 짐으로 돌리는 행위는 60여 년간 국민의 사랑으로 커온 기업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고 밝힌다.
이 회장은 채권단과 계열사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출연했다. 당시 삼성생명 주식은 70만 원 상당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므로 2조 8000억 원이라는 거액의 사재를 털어 자신의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 회장의 대승적 결단은 채권단과의 부채 상환 협의 과정에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채권단은 삼성 측에 금융제재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삼성 측은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채권단과 삼성 측은 1999년 8월 24일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합의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갑(이건희 회장)은 도의적 차원에서 삼성자동차의 정리와 관련하여 예상되는 을(삼성계열사)의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 중 350만 주를 병(채권금융기관들)에게 무상으로 증여하고
―이를 위해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2000년 12월 31일까지 처분하여 그 대금을 병에게 지급하여야 하고, 그 처분대금이 2조 4500억 원에 부족할 경우 갑은 병에게 개인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을 50만 주까지 추가로 증여한다.’ 또 합의서는 삼성 측이 부채를 갚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지연이자도 책임지도록 하고 있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삼성 측은 이 합의서에 대해 ‘무효’를 주장한다. “채권단의 강압에 의해서 합의서를 작성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 삼성 측은 이 합의서가 회사정리법 위반이라는 주장도 덧붙이고 있다. 즉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는 회사정리법에 의거한 회사정리절차에 따라 채무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와는 별개인 합의서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주 채권금융기관인 서울보증보험 측은 “합의서가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채권단 측은 “합의서가 아니었더라면 이건희 회장은 IMF 때의 다른 파산 기업들과 비슷한 전철을 밟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삼성 측은 합의서라는 슬기로운 방법을 선택해 그룹의 위기를 넘기고 이후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다”고 주장했다. 즉 삼성 측이 자체적으로 판단해 합의가 이롭다고 생각해 서류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강압이라고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또 채권단 측은 회사정리법 위반이라는 삼성 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회사정리법 위반 문제는 합의서를 작성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며 합의서와는 별개의 문제다. 삼성은 약정한 내용을 이행만 하면 될 뿐”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삼성 측은 삼성생명 주식을 상장해 이건희 회장이 출연한 주식을 현금화할 수 있다. 더구나 작년 생보사들이 상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에 지연이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상장을 했어야 했다. 상장을 통해 채권단과 합의를 했다면 소송은 좀 더 일찍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성 측이 상장을 하지 않는 데에는 좀 더 미묘한 이유가 있다. 바로 그룹의 복잡한 지배구조 때문이다.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대주주인 삼성에버랜드는 금융지주회사로 변신해야 한다. 에버랜드의 대주주는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씨(삼성전자 전무)다. 삼성생명은 상장을 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비 금융업종인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삼성의 순환출자구조의 틀은 흔들리고 이재용 씨 역시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어려워진다. 결국 이 씨는 삼성생명을 상장하면 삼성전자를 포기해야 한다. 경제전문가들은 삼성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삼성 측으로서는 삼성생명 상장을 통해 삼성차 부채 문제도 해결하면서 삼성전자의 경영권도 확보하는 방법을 찾아봤음직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재용 씨가 모두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이 금산분리법을 완화하면 이 씨에게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줄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 물론 인수위에서 4대 재벌의 은행 소유를 불허 방침을 발표했지만 아직 결정 난 바 없다. 말하자면 삼성 측으로서는 금산분리법 완화가 지배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2005년 국정감사에서 삼성차 부채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던 대통합신당 박영선 의원은 이 소송이 삼성 측과 채권단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채권단인 서울보증보험과 우리은행 두 금융기관에만 무려 18조 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기 때문에 삼성차 부채를 회수하지 못하면 결국 국민들의 혈세로 채워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삼성차 부채 건은 이번 특검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용철 변호사가 “법정관리 중인 삼성자동차가 분식회계서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파산 법원 공무원을 매수, 관련 서류를 소각했다”고 폭로한 것. 김 변호사는 “당시 삼성자동차의 손실이 너무 커 서울보증의 보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대형 적자를 약간의 흑자로 분식했다”고 주장했다. 특검에서 삼성차 부채에 관한 수사까지 진행될지는 미지수. 그러나 만약 특검을 통해 분식회계와 공무원 매수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면 이번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로의 부담이 큰 만큼 혹시 채권단과 삼성 사이에 극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을까. 서울보증보험 측은 “합의 시도가 있긴 했지만 현재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결국 천문학적인 소송가액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소송은 대법원까지 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수록 지연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현재 이자율이 19%인데 만약 피고인 삼성이 1심에서 패소할 경우 20%가 되어 부담은 더욱 가중된다.
한편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번 소송에 관해 “현재 특검 때문에 거의 신경을 못 쓰고 있는 상황이다. 선고공판에서 결과가 나오면 입장을 표명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1심 결과는 합의서가 유효냐, 무효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과연 법원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까.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