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74
구례 운조루의 상징인 쌀뒤주. 뒤주 아랫부분 마개에 ‘누구든지 쌀을 퍼갈 수 있다’는 뜻인 ‘타인능해’가 적혀 있다. 사진제공=경향신문
쌀뒤주설화의 내용이다. ‘미궤설화(米櫃說話)’라고도 한다. 고전소설 배비장전(裵裨將傳)의 소재로 알려져 있다. 뒤주 속에 들어간 사람은 배비장뿐만이 아니다. 실제 조선조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구한말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3일 만에 쫓기는 신세가 된 개화파 김옥균은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승선할 때 러시아군의 눈을 피해 들어가 숨은 곳이 뒤주였다.
뒤주는 쌀 등 곡물을 보관하는, 나무로 만든 궤(軌)다. 보관하는 곡물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 대형은 쌀을 보관하고 중형은 잡곡을, 소형은 깨나 팥을 보관한다. 큰 것을 쌀뒤주, 작은 것은 팥뒤주라 부른다. 쌀뒤주는 보통 쌀 한두 가마들이의 크기이고, 잡곡뒤주는 서너 말들이로 쌀뒤주보다 작다. 한 가마(80㎏)짜리가 많다.
나무의 속을 파내고 통으로 만든 것과 나무로 짜서 만든 것이 있다. 통나무로 만든 뒤주는 밑동과 머리에 따로 널을 대어 막는다. 머리 부분의 한쪽을 열 수 있도록 문짝을 달고, 이곳으로 낟알을 넣거나 퍼낸다. 일반적인 형태는 두꺼운 통판으로 듬직하게 궤짝처럼 짜는 것이다. 통풍이 잘되고 해충을 막을 수 있도록 네 기둥에 짧은 발을 달았다. 뛰어난 곡물 보관법이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고 무쇠 장식과 놋 장식으로 된 쇠장석을 달아 자물쇠를 채웠다. 주로 회화나무를 재료로 사용한다. 옻칠을 하거나 자개를 입히거나 장식을 다는 따위의 치장을 하기도 했다.
네모반듯한 상자를 여러 개 만들어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이엉을 덮어 만든 것도 있다. 일반적인 뒤주의 서너 배 크기로 만들어 앞면에 기둥을 덧대고 홈을 파서 널빤지로 막기도 했다. 이런 거대한 뒤주는 동화사(桐華寺, 대구 팔공산)의 요사채(사찰 내에서 전각이나 산문 외에 승려의 생활과 관련된 건물) 등에서 볼 수 있다. 한층 더 크게, 곳간 만하게 만들어 마당 한쪽에 세우고 지붕을 이어 비바람을 가리게 하거나, 집의 한 끝에 따로 한 칸을 설치하고 정면에 문을 만들어 완성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회화나무로 만든 약 70가마들이 대형 쌀뒤주가 전라북도 김제시 월촌면(月村面) 장화리(長華里)에 보존되어 있다.
요즈음 쌀은 주방 싱크대에 보관하거나 김치냉장고의 한자리를 차지한다. 1970년대 ‘쌀뒤주의 혁신’이라는 플라스틱 쌀통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쌀은 뒤주에 보관했으며 대청마루 한가운데를 차지한 살림살이 1호였다. 1920년대 신문에는 뒤주가 놓인 위치가 주부의 살림 동선에 비효율적이라며 부엌이나 찬방으로 들여놓을 것을 권장하는 글도 실려 있다. 그러나 집안의 중심은 마루이며, 마루의 중앙에는 뒤주를 놓고 생활의 근본인 양식을 저장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시절이다. 이 뒤주의 열쇠를 차고, 식량을 내어주는 일은 안주인 고유의 권한이었다. 광전대가(廣田大家)의 맏며느리 열쇠꾸러미에는 음식으로 가득한 곳간 열쇠뿐 아니라 뒤주열쇠도 꿰여 있었다.
이들 광전대가의 맏며느리들이 집안대대로 매달 잊지 않고 해야 할 일은 뒤주에 쌀을 채우는 일이었다. 이웃의 배고픈 사람들에 대한 배려였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는 운조루(雲鳥樓)라는 구십구칸 양반고택이 있다. 이 운조루의 명물은 쌀 2가마 반이 들어가는 200년 넘은 뒤주다. 뒤주 아랫부분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 있다. 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이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에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정부의 쌀 관세화 선언이 뜨거운 감자다. ‘식량주권의 포기’라고 논란이 분분하다. 쌀은 우리 민족의 주식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 대청마루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뒤주는 오늘날 우리가 포기하려는 식량주권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참고문헌 <문화원형백과 한국전통가구>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의 농기구> (2001) 서울: 어문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