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경만 몰랐던 그의 ‘우아한 삶’
서 씨는 18세였던 1990년 청주 S 파 폭력조직 5기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90년 4월 29일 동료 조직원 12명과 함께 청주시 상당구에서 구역 순찰을 돌던 중 상대 조직원인 곽 아무개 씨(당시 17세) 등 4명과 마주쳤다. 경쟁조직원이었던 이들은 시비가 붙었고 끝내 흉기를 휘둘러 곽 씨가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치고 말았다.
재판부는 최근 재판에서 “피고의 죄책이 가볍지 않지만 18세의 어린 나이에 선배의 지시에 의해 순찰을 돌다 우발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점과 싸움이 발생하자 인근에 주차돼 있던 화물차에서 일명 ‘빠루’라 불리는 둔기를 들고 현장에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싸움이 종료돼 도망을 쳤다. 범행 가담 정도가 경미하고 도피생활 동안 이미 많은 고통을 받았고 늦었지만 피해자 가족과도 합의해 사회봉사를 전제로 형집행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당시 서 씨와 함께 범행을 저지른 공범들은 같은 혐의로 최하 징역 2년에서 12년까지 실형을 언도받고 복역을 마친 상태였다. 재판부로서는 같은 혐의의 피의자에게 이례적인 다른 판결을 내린 셈.
그러나 문제는 서 씨가 수배 기간 중 10여 년 동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해 왔다는 사실이다.
서 씨는 수배중이던 97년 7월 18일 무단 전출자로 주민등록이 말소된 이후 10여 개월 만인 98년 5월 15일 주민등록을 갱신했다. 이후 서 씨는 충북경찰청이 시행하는 자동차운전면허 시험에서 2종 보통면허를 취득했으며 99년에는 이를 1종으로 바꿔 취득하기도 했다. 서 씨는 같은 해에 징병검사를 받고 제2 국민보충역으로 국방의 의무까지 마쳤다고 한다.
서 씨는 이후 취직도 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대전 태평동의 중고자동차 매매상사에서 근무했으며, 2002년부터는 청주의 한 카드회사 채권추심팀에서 일했다. 그는 이 회사에서 만난 아내와 2006년 결혼했는데 당시 4박 5일 일정으로 해외로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 물론 여권 신청과정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그가 경찰의 음주단속에 적발되었다는 사실. 서 씨는 2002년 12월 음주운전 혐의로 약식기소돼 법원으로부터 벌금 70만 원의 명령을 받아 납부한 바 있다. 또 서 씨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 도둑이 들어 경찰에 신고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체포된 건 올 1월 14일. 퇴근 후 청주 가경동 자택에서 아내와 함께 있다 출동한 검찰에 의해 긴급체포됐다.
수배 중인 서 씨가 어떻게 이런 정상인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서 씨는 자신이 수배 중임을 모르고 있었을까. 수배 중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런 대담한 행동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재판과정에서 서 씨는 “살인혐의가 아닌 폭력혐의로 수배 중인 줄 알고 있었고 폭력혐의는 공소시효가 7년이기 때문에 정상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서 씨는 개인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카드사 채권추심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이 폭력혐의로 수배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 씨의 예상대로 실제 경찰의 정보망에도 그는 폭력혐의 수배자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서 씨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셈인데 검찰은 왜 서 씨를 체포하게 됐을까.
경찰과 달리 검찰에선 서 씨가 살인혐의자로 수배되어 있었던 것이다(아래 관련기사 참고). 경찰은 서 씨의 폭력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자 서 씨 사건에 대해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검찰에선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최근 대검에서는 강력 미제사건에 대한 일제 정리를 하고 나섰는데, 여기서 서 씨의 사건이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검찰은 서 씨를 신원조회하게 되었고 청주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 공소시효 8일을 남겨놓고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서 씨의 입장에선 퇴근 후 아내와 집에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검찰에 의해 체포된 셈이다. 서 씨의 변호사도 재판과정에서 “이미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피고인을 검찰이 무리하게 기소해서 처벌을 하려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공소시효가 다 끝난 줄 알고 있었던 서 씨로서는 재판부의 판결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범죄현장에 함께 있었던 공범들이 서 씨보다 훨씬 높은 형량을 받은 것에 비하면 오히려 다행.
현재 검찰은 서 씨에 대해 4월 24일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동료 조직원들이 최하 2년 이상의 실형을 받고 복역한 상황에서 수십 년 간 도피생활을 했음에도 정상을 참작한 원심 재판을 수긍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